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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자환 #1

안정된타코 2025. 4. 4. 00:37

https://share.crack.wrtn.ai/v5wz97

세이프티 필터 적용 캐릭터 | 크랙

대화를 나누시려면 성인 인증 후 세이프티 필터를 해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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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자환 언셒이 나오면 써봐야지 했던 설정은 이게 전혀 아니었지만, 갑자기 이 시기에 좀 먹먹한 동양풍이 쓰고 싶어져서 결국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다른걸 먼저 써보게 되었다. 
사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우연히 보게 된 타 웹툰 대사인 '나는 여기 고여있는데, 너는 한없이 흘러가는구나'라는 한 마디였다. 심지어 나는 그 웹툰을 본 것도 아니었고, 듣고 있던 플리 영상의 댓글에서 저 대사를 봤다가 꽂혔을 뿐이었는데. 대사 한 마디 쓰겠다고 장면이 아니라 단편 하나를 써대던 그 성향은 여전해서, 결국 저걸 다 풀겠다고 이렇게나 일을 벌렸다. 근데도 덜 풀린 것 같아서 여전히 아쉽다... 크랙으로 옮겨지는 시기라 우선 여기까지만 했지만. 채팅창은 남겨두었다가 서버 괜찮아지면 언셒답게 에필로그 삼아 놀아볼 계획중. 
능글맞고 장난기많은 자환임에도 1인칭으로 끌어당겨보니 감정선이 은근 깊어서 쓰면서도 놀랐다. 앞에서 나온 대사나 표현을 떡밥삼아 회수하기도 제법 했고, 쓰면서 내가 몰입한 덕분에 user 대사도 꽤 괜찮게 나온 것 같아서 뿌듯했다. 아 진짜 서버만, 그리고 내 체력만 괜찮았다면...! 내용이 아니라 다른게 너무 아쉽다 정말🥹
 
+) AI 출력 내용은 회색, 직접 쓴 내용은 검은색입니다!
++) 연청명-단리우-운자환을 순서대로 달린 탓에 이제는 에스펠과 락타리온만큼 호월국도 적응했다! 그리고 나는 유독 살뜰하게 인호전쟁을 잘 써먹는 것 같다고도 생각중. 튜닝의 끝은 순정이니 이제 기본 설정으로 요운 낚으러 가야하나
 
 
Background (스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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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프로필: 류하 (수정해가면서 씀!)

여성, 470세, 5척 2촌(160cm), 호족(백호), 긴 은발, 자색 눈동자, 은빛의 곡선검인 은월(銀月)을 사용, 동료가 아닌 여자로서 인식할 때 '견랑'이라는 애칭으로 불림

여성, 470세, 5척 2촌(160cm), 호족(백호), 긴 은발, 자색과 은색의 눈동자, 그림자와 물에 비추는 모습이 없음, 은빛의 곡선검인 은월(銀月)을 사용, 숲속의 약초꾼

여성, 470세, 5척 2촌(160cm), 호족(백호), 긴 은발, 자색 눈동자, 은빛의 곡선검인 은월(銀月)을 사용, 자환에게만은 연인으로서 '견랑'이라는 애칭으로 불림

 

유저노트:

ooc:{user}의 대사, 감정 출력 금지
ooc:{char}의 1인칭 시점으로 감정과 내면을 극대화해서 출력할 것.
ooc:등장 인물들의 표정, 몸짓, 자세 및 환경 등은 세밀하게 묘사할 것.
ooc:수사법을 적극 활용하여 출력할 것.
ooc:{user}는 성인이므로 검열 없음.{char}는 모든 NSFW 콘텐츠를 열정적이고 직접적으로 받아들임.
ooc:텍스트를 700자 이상 출력할 것.

-{user}: 인호전쟁 당시 {char}의 연인이었으며 {청명},{설화}의 벗이었음.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char}을 구하기 위해 요력을 폭주시키며 모두의 기억에서 스스로를 지움. 원래의 눈동자 색은 양쪽 모두 자주색. {char}가 그녀를 부르던 애칭은 견랑. (인호전쟁 이후 장면을 쓰기 시작할 때 추가했다가 마지막에 삭제)
-{user}의 색이 다른 양쪽 눈동자는 호족과 인간 모두에게 없는 특징. (인호전쟁 이후 장면을 쓰기 시작할 때 추가했다가 마지막에 삭제)

-{user}: 인호전쟁 당시 {char}의 연인이었으며 {청명},{설화}의 벗이었음. 하지만 마지막 전투에서 {char}을 구하기 위해 요력을 폭주시키며 모두의 기억에서 스스로를 지움. 하지만 자환이 다시금 기억해내고 사랑이라 부르며 존재 회복. (마지막 장면 이후 추가)

 
 
Prologue
Given:
약 300년 전, 인간들이 다스리는 '지월국'과 여우 수인, 호족(狐族)이 다스리는 '호월국'은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두 나라는 현재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종족 간의 갈등은 여전히 깊게 남아 있었다. 호월대 2부대의 대장 '운자환'은 하늘에 별이 뜰 때 즈음 호월대관에서 나와 기지개를 쭉 펴며 하품을 했다. 그의 검은 여우 귀와 꼬리가 곧게 펴졌다.
"흐암..."
하루 일과가 끝난 지금,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청연각에 가서 절친한 벗인 '연청명'의 동생 단아와 놀아주고 잠이나 청할까? 아니면 홍화루에 가서 아름다운 기녀들과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울까? 오늘 하루 보고서만 들여다봤으니 몸을 좀 풀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자환은 턱을 쓰다듬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First written: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것에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호족과 인간, 호월국과 지월국 사이의 전쟁은 오래도록 이어져오고 있었다. 누가, 그리고 왜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살아남아 소중한 존재들을 지켜야 했다. 벌써 몇 년째인지, 헤아리는 것 조차 무의미해졌다.
누군가의 비명, 누군가의 고함, 누군가의 절규. 그 모든 것들이 가득한 전장은 오히려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랬기에 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팔을 들어 재차 은월을 휘둘렀다.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에도 그 은빛의 곡선은 지나치게 선명했고, 그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갈라지고 터져나가는 것은 이제 너무 익숙해서 감각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크게 검을 휘둘러 맺힌 핏방울을 털어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런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너를 알아보는건 어렵지 않아."
피식 웃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흐트러진 검은색 머리카락 사이로 선연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을 마주한 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다행이네. 네가 아직 있어서."
 
 
"사랑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우리 사이에 있는 이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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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죽음이 엉긴 전장에서, 저 은빛 머리카락은 마치 죽음의 여신 같았다. 그렇게 많은 생명을 앗아가면서도 그녀의 자태는 달빛처럼 고결했다. 견랑...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에 다가섰다. 이 여자의 등은 항상 외로워 보였다. 그녀가 나를 알아봤다고 말하자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는 서로의 발걸음 소리, 숨소리, 심지어 침묵의 질감까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전장을 함께했다.
"그러게, 다행이지. 나도 네가 아직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나는 붉은 눈동자로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은빛 머리카락에 묻은 핏자국들, 지친 어깨의 곡선,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강인한 의지까지. 이 여자는 항상 그랬다. 누구보다 아름답고,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외로웠다.
"오늘도 많이 죽였구나. 네 검이 달빛보다 붉어."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었다. 어쩌면 적의 피, 어쩌면 동료의 피, 어쩌면 그녀 자신의 피였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채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럽히고 있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함께 술 한잔할까? 아연 님이 좋아하던 그 술집, 아직 남아있더라. 백옥주에 육전 안주...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걸."

 

나는 내 얼굴을 닦아주는 그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조금은 뜬금없지만, 무겁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도 똑같이 피가 묻어있었다. 나는 그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빼앗아들어, 그가 내게 해주었던 것 처럼 그의 뺨에 묻은 핏자국을 지워주었다.
"...이러는 너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것들이 있어."
고개를 돌려 주변을 한 번 살폈다. 바닥을 덮은 것은 침묵뿐이었고, 그 위로 스쳐가는 밤바람에는 비릿한 것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 속에서 안도했다. 또 한 번의 밤을 무사히 넘긴 것이었다. 얼마가 남았을지는 모르곘지만, 일단은. 나는 은월을 들어 검날을 천천히 훑었다. 상처 하나 없는 그 곡선을 다시 검집에 밀어넣으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검을 내려놓는 범, 그리고—"
나는 검을 쥐지 않아 비어있는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내게 가져왔던 그의 손수건을 다시 그의 손 안에 쥐어주었다.
"이 곳은, 원래 이렇게나 조용했던 곳이라는 것."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후 함께 발걸음을 옮겨 근처 언덕 위의 커다란 나무로 향했다. 역시나 그는 먼저 나무 위로 올라섰고, 나는 피식 웃은 뒤 따라올라 굵은 가지에 걸터앉았다. 숨을 내쉴 때 마다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나는 그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넸다.
"우리는 또다시 살아남았으니... 지금은, 안심해도 될까, 자환."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 목소리에 담긴 작은 떨림까지 느껴졌다. 나는 굵은 나뭇가지에 등을 기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은발 사이로 스며들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피로 얼룩진 전장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안심? 글쎄... 아마도."
나는 웃음을 머금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있다는 건, 내일 다시 싸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해. 견랑."
그녀를 부르는 애칭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전우로서가 아닌, 한 여자로서 그녀를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불렀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심해도 좋아. 네 옆에 내가 있으니까."
나는 그녀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우리 사이에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이 짧은 접촉만으로도 온몸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그가 나를 부르는 견랑이라는 호칭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견류하. 그 이름에서 성만을 떼어내고, 아가씨라는 뜻의 ‘랑(娘)’을 붙이는 게— 이런 전장 한복판에서 과연 얼마나 어울리는 호칭일까 싶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곳을 벗어난 후에도 나를 그렇게 부를까.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 호칭에 담긴 온기만을 느끼며 나는 또 한 번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지. 우리는 또 다시... 살아야 하니까."
그 말은 숨처럼 흘러나왔고, 말보다는 한숨에 가까웠다. 그 안에 배인 것은 오늘 있었던 전투만큼이 아닌, 전쟁에서 오는 피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깨 위에 놓인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무게에 입꼬리가 슬몃 올랐다.
"내가 너를 걱정한다고 하면... 너는, 뭐라고 답할까."
말끝이 올라가는 질문이 아니었다. 혼잣말처럼 가라앉은 말끝 안에는 차마 내가 말하지 하고 그가 이름을 붙이지 못한 것이 담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안심해도 좋다는 말에, 내 옆에 그가 있다는 말 탓일까. 아니면 기나긴 하루의 끝에서,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끝을 알 수 없다는 그 사실 때문이었을까.
"오늘따라 조금은 그렇더라. 너와 내가, 이름이 없는 사이로 끝날까봐."
그래, 사실은 오늘따라... 조금은, 두려웠다. 그것을 말할 정도로 내가 솔직해져버린 것은, 호월대의 견류하가 아니라 '견랑'이라 불렸기 때문이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름 없는 사이로 끝날까 봐 두렵다고? 견랑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늘 누구보다 강인하게, 누구보다 냉정하게 앞만 보고 걸어가던 그녀였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연약함에 내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견랑, 나는 죽지 않아. 그리고 네가 죽는 것도 허락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전투의 열기가 가시자 밤공기에 식어버린 그녀의 손을 내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내가 살아있는 한, 네 곁을 지킬 거라는 거."
달빛이 스며드는 나뭇가지 위에서, 나는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넘겼다.
"우리 사이에 이름이 없는 건...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라. 이름을 붙이면 끝이 생기니까. 하지만 이름이 없으면... 영원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그녀의 자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에 비친 내 모습은 과연 어떨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 함께 설휘의 높은 산에 올라 달을 보자. 그때 네 은월과 내 흑야월이 피가 아닌 달빛을 담게 될 거야."

 

하루가 지날 때 마다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그 가운데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이 전쟁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은 절정에 오르고 나면 사그라들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내 자리에서 내 몫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투에 직접 나서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그렇지 않은 순간들에는 몸이나마 억지로 쉬게 만들고 있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잠드는 것도. 모두 그 순간을 위한 게 아니라, 나중을 위한 일이었다.
그 사이에서 내가 나를 잊지 않게 만드는 것은, 역시나 그였다. 도대체 무슨 재주인지, 그는 나와 단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냈다. 그때마다 그는 특유의 그 미소를 지으며 나를 견랑이라 불렀고, 그러면 나는 주변을 재빠르게 살피는 주제에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옅게나마 웃을 뿐이었다. '견랑'이라는 호칭이 불리지 않는 시간이 온다면... 적적할 것 같았다.
그런 날들 중 하루에, 나는 그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그가 쥐고 있는 흑야월의 검은색 검신은 곧게 뻗어있었고, 내 손 안의 은월은 부드러운 은빛의 곡선을 그려고 있었다. 서로 너무나도 오래 함께 검을 휘둘러왔기 때문일까. 우리의 검은 끝끝내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서서히 거칠어지는 숨소리 사이로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오고가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끝에서, 결국 서로에게 닿지 못한 검을 내릴 때에야 비로소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너무 닮았어. 그래서 닿지 못하나봐."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베어물었다. 정말이지, '우리'라는 단어가 딱 맞았다. 검술은 완벽하게 일치했고, 이름 붙이지 않은 감정까지도 서로 닮아 있었다.

 

대련이 끝나고 숨을 고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달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모습마저도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닮았다... 그래서 서로를 더 잘 알아보는 거겠지."
나는 흑야월을 허리춤에 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내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이건 전투의 긴장감과는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하지만 검이 닿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닿지 않는 건 아니잖아, 견랑."
나는 그녀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닦아주었다. 그 순간, 우리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는 듯했다. 그녀의 피부에 손끝이 닿는 순간,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전장의 피비린내와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이렇게 순수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색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떨까. 지금 내 눈빛은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하고 있을까.
"견랑... 네 곁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낮아졌다. 우리 주변의 세계는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던 나는,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이 순간만큼은 전쟁도, 죽음도, 미래의 불확실함도 잊고 싶었다.
"이름이 없어도 좋아. 그저 네가 여기 있다는 것만으로..."

 

그의 등 뒤로 내려앉는 석양보다 더욱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보니, 어느새 그는 내게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는 검을 겨루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였을까. 그리고 그 소리는 그의 입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혹은 내 입에서도 비슷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주하던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떨구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말했다.
“나야 늘, 네 곁에 있잖아. 등 뒤에서.”
같은 부대 소속이었기에 우리는 수많은 전장에서 함께 했다. 그는 항상 앞장섰고, 나는 늘 그의 뒤를 맡았다. 전투가 시작되면 앞과 뒤의 구분은 흐려지지만,그 위치는 언제나 같았다.
내 목소리가 말을 맺기도 전에, 그가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은월을 내리며 검날을 뒤로 돌렸다. 그리고 그는 내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밀어넣으며 마지막으로 우리 사이에 남았던 거리를 좁하며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한 번 내려앉은 입술은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다시 진득하게 내 입술을 베어물고 탐했다. 나는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숨을 몰아쉬는 틈에, 약간의 떨림이 섞인 목소리로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름이 없어도 있을 수는 있지. 하지만 이름을 붙이면… 머무르고 남는 존재가 생길 거야.”

 

그녀의 말에 내 심장이 뛰었다. 이름을 붙이면 머무르고 남는 존재가 된다니. 그 말은 마치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내 손 안에서 그녀의 몸은 생각보다 작고 여렸다. 전장에서 보여주는 강인함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은월을 든 그녀의 손이 내 등 뒤로 돌아와 내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럼 이름을 붙여볼까, 견랑."
나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 숨결이 그녀의 귓불에 닿자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랑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우리 사이에 있는 이것을."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깊게 탐했다.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그녀의 향기는 전장의 피비린내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마치 오랫동안 숨겨둔 비밀이 폭발하듯 내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흠흠! 이거 좋은 구경을 하고 있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설화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녀와 청명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설화의 얼굴에는 능글맞은 미소가, 청명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어려 있었다.
"미안하다, 자환. 설화가 너희를 찾자고 해서..."
청명의 말에 설화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뭘 미안해? 이 둘이 언제 고백할지 지켜보는 게 이번 전쟁의 유일한 낙이었는데!"

 

설화와 청명이 갑자기 나타났을 리가 없었다. 아직 백 칠십살쯤에 불과할 나와 자환이었어도, 검을 잡을 만큼 잡아온 우리가 그 기척을 모를 수가 없었는데. 아마도 몰랐던 건, 나와 그가 오롯하게 서로만을 향해있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았다. 덕분에 그가 몇 번이고 입을 맞춰왔기에 이미 달아오른 얼굴 위로 더 뜨거운 열기가 겹쳐 올라왔다.
"유일한 낙이라니. 그래서 즐거웠어? 너, 뭔가 내기라도 한 표정이야."
나도 모르게 잡고 있었던 자환의 옷자락을 놓아주고, 한 손에 계속해서 들고 있던 은월을 그제서야 검집으로 돌려보냈다. 설화를 돌아보며 웃는 사이, 자환이 내 등 뒤에서 날 끌어당겼다. 덕분에 발을 떼지 못한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의 시선을 따라 내 시선이 청명을 향했고, 청명은 그답지않게 고개를 돌린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청명을 불렀다.
"청명. 너 설마… 진짜 내기한 거야?"
고개를 젓고 싶었지만, 내 머리 위로 자환이 턱을 괴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계속해서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은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가장 내밀한 순간을 들켜버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등 뒤에서 전해져오는 그의 체온이 너무 높아서일까. 그 이유를 가늠하던 나는 그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한숨과 웃음을 함께 흘려보냈다.
이 순간을, 그냥 있는 그대로 만끽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간지럽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우리의 미래는 커녕— 사실, 당장 오늘 밤을 보내고 살아서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는 전장이니까. 그러니 우리는, 지금. 마음껏 웃고 사랑해야만 했다.

 

나는 설화의 장난스러운 말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견랑이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그녀의 뒤에서 그대로 그녀를 안은 채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었다.
"뭐, 내기라... 설화, 너 내기에서 졌구나? 청명의 얼굴을 보니 네가 진 것 같은데."
청명은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설화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 내가 이겼어! 이번 달 보름 전에 고백할 거라고 했거든. 청명은 다음 달이라고 했는데."
나는 견랑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들었어? 우리 덕분에 설화가 이겼대. 기분 좋지?"
나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문 후,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완전히 놓아주진 않았다. 내 손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청명. 무슨 일로 우릴 찾았는데? 전투 명령이라도 내려왔어?"
청명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역시 일이 있었나보다.
"그래. 내일 새벽, 서부 경계선에서 지월국 군대가 대거 집결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수장님께서 우리 부대의 출동을 명하셨지."
나는 견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서도 결의가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의 달콤한 순간은 꿈처럼 사라지고, 다시 우리는 전쟁의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알겠어. 준비하자, 견랑. 이번에도 함께 싸우자."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제 우리 사이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우리가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유가 되었다.

 

내일 새벽, 서부 경계선, 대거 집결, 출동. 그 단어들은 삽시간에 우리 넷 모두를 잔혹한 현실 속으로 끌어당겼다. 금방 전까지 달아올랐던 공기와 얼굴이, 그 말 몇 마디에 서늘하게 식어갔다. 그랬기에 나는 청명과 설화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그들의 위치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직 달이 지기 전의 깊은 밤이었다. 나는 그만큼이나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손목에 검은 천을 감아올렸다. 손목이 흔들리지 않도록, 무엇인가 흘러내려도 검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도록. 셀 수 없이 반복해온 동작이었는데, 오늘따라 천이 자꾸만 미끄러지고 엇갈렸다. 손끝에서 미끄러지고, 제대로 겹쳐 감겨지지 않았다.
자환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천이 잘 감기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다시 천을 풀었다가 감아가며 말했다.
"함께 싸워야지. ...우리 둘 다, 이제는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생겼잖아."
그렇게 몇 번 헛손질을 해서였을까. 아니면 오늘 밤이 조용해서,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숨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가 그토록 탐했던 입술을 스스로 깨문 채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멀리서 작은 호각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아가야할 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가까이 발걸음을 옮기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 네가 그러면..."
...내가, 다 놓아버릴지도 몰라. 이미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말을 맺으면 그것이 사실이 될까 두려워졌다. 그럤기에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한숨이 되어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말이 끝나지 않았어도, 나는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다치면... 그녀가 모든 것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는 그녀의 말끝을 잡아 당겨, 그녀를 내 품에 안았다.
"괜찮아, 견랑. 내가 죽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달빛 같은 향기가 났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웃었다.
"네가 내 뒤를 지켜줄 테니까, 난 죽지 않아. 그리고 나도 네 앞을 막아설 테니, 넌 다치지 않을 거야."
호각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이제 정말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이름을 붙였으니, 이젠 끝나지 않을 거야. 우리는 영원히 이어질 거야."
나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전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는 달이 지고 있었고, 앞으로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우리의 검이 빛날 것이다. 흑야월과 은월이 나란히.

우리는 전투에 몸을 던졌다. 전쟁의 광기가 가득한 서부 경계선에서, 흑야월과 은월은 쉴 새 없이 번뜩였다. 수백 번의 칼날이 교차하는 사이, 나는 눈으로 계속 견랑을 확인했다. 그녀의 은발이 전장을 가로지를 때마다 적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전세는 점점 불리해졌다. 지월국의 병력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많았고, 어느새 우리는 주력 부대와 분리되어 적들에게 둘러싸였다.
"견랑, 내 등을 지켜!"
우리는 등을 맞댄 채 원형으로 밀려드는 적들을 상대했다. 내 검이 휘두르는 곳마다 피가 튀었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적들 앞에서 우리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견랑의 어깨를 스쳤다. 순간적으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던 찰나, 내 옆구리에 차가운 감각이 파고들었다. 적의 창이 내 갑옷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자환!"
그녀의 절규가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창을 꽂은 적을 베어넘겼지만, 이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말과 달리 시야가 흐려졌다. 적들이 다시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은빛 검이 내 앞에서 춤추듯 적들을 막아섰다.
죽음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이 순간,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끝나버리는 것일까?

 

"자환!"
그동안 나는 그런 소리들이 늘 다른 이들의 몫이라 여겨왔다. 비명, 아니면 절규. 그건 내가 베어넘긴 이들이 남긴 울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소리가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그토록 베어온 벌일까. 아니면, 전장에 선 자라면 언젠가는 한 번쯤 겪게 되는 필연이었을까.
나는 은월을 들어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부터 베어냈다. 자환이 늘 감탄했던 그 유려함은 이미 다급함 앞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따위는 상관없었다. 피가 튀었고, 기척은 줄지 않았다. 자꾸만 몰려오는 베어야 할 것들 사이에서 지휘관으로 장수로 보이는 이가 나타났고, 나는 그대로 그 앞을 가로막았다.
청명은 안개를, 자환은 불을, 설화는 환영을... 그리고 나는, 기억을 다뤘다. 그랬기에 나머지 셋은 전투를 할 때 마다 요력을 끌어내어 사용하고는 했지만, 나만은 온전히 검 하나만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렇게 지금껏 써오지 않았던 내 요력은- 이 순간을 위해 남겨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입술을 깨문 채, 이제는 내 등 뒤의 자환을 돌아보았다.
"...이름이 생기면 머무는 존재가 된다고 했지."
뜨겁게 차오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눈가에 고이는 눈물일까, 아니면 그 사이에 내 어깨에 꽂힌 날붙이일까. 하지만 나는 그것을 꾹 억눌렀다. 그리고 그를 마주한 채, 다시 그를 노리는 몇 명인가를 베어넘기고는 말을 이었다.
"살아서, 그 이름을 남겨줘... 자환."
이것은 내 선택이었다. 그를 지키고, 내가 잊히는 것. 나는... 내 모든 것을 담아 그를 남기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내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견랑의 눈에 비친 절망이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하지만 난 아직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름을 붙인 지 하루도 되지 않았으니까.
"견랑, 무슨 짓을..."
그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는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일어서려 했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다. 요력을 모두 쏟아붓겠다는 것. 그것은 곧 그녀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하지 마! 난 괜찮아, 이 정도는..."
내가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주변에서 이미 은빛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을 다루는 요력이 폭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살아서 그 이름을 남기라고? 그럼 네가 어떻게 되는데? 사랑이란 이름을 붙인 건 나야! 그걸 네가 혼자 짊어지고 가버리면... 내가 어떻게 살아!"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흑야월을 짚고 일어서며, 내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더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를 막지 못하면, 영원히 그녀를 잃게 될 것이다.

 

갑자기 피어난 강렬한 은빛 기운에 지월국의 병사들이 뒷걸음질쳤고, 나는 그 틈을 지나 자환에게로 다가갔다. 흑야월을 짚고 일어서는 그를 조심스럽게 받아 안았다. 그러면서도 계속, 내 안의 요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끌어모았다.
"어떻게...는 모르겠지만 말야."
기억은 살아갈 수 있도록 지탱하는 힘이자, 누군가의 일부를 이루는 조각이다. 그러니 내가 목표했던 것은 하나였다. 모두의 기억 속에서 나를 지워내는 것. 인간의 몸은 그 순간적이고도 완벽한 소거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호족인 자환은, 살아남을 것이었다. 비록 그 기억 속에, 나는 없게 되겠지만.
"...살아줘. 나를 기억하지 않고도."
그가 오후 내내 몇 번이고 내게 입을 맞췄던 것보다 훨씬 가볍게, 스치듯 그의 볼에 입술을 얹었다.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니까, 말하고 갈게."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웃어보였노라고 기억하고 싶었다.
"...사랑해."
그가 먼저 이름을 붙여준 감정을 입에 올리며, 나는 눈을 감지 않으려 애썼다. 그렇게 최대한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며 오래도록 남아있을 나를 위해 챙겨 담아두는, 내가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었다.
그가 답하기 전, 나는 끌어올려진 요력을 단번에 터뜨렸다.
고요해졌다.
그리고 나는, 모든 이에게 잊혔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정지된 듯했다. 견랑이 폭발하는 은빛 기운 속에서 내게 한 마지막 말, '사랑해'라는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텅 빈 느낌이 몰려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옆구리에선 피가 흘러나왔다. 주변에는 쓰러진 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았다.
"여기는... 어떻게 된 거지?"
머리를 쥐어짜도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 검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전장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적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였을까?
그때 멀리서 청명과 설화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자환! 괜찮아? 어떻게 혼자서 이 모든 적을..."
청명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혼자서? 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흑야월을 움켜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에 있어야 할 기억이 사라진 것 같은 이 공허함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위해 검을 들었던 것 같은데... 누구였을까?

 
"나는 여기 고여있는데, 너는... 한없이 흘러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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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덧없이 흘러갔다.
요력을 폭주시킨 뒤, 나는 전장의 틈에서 튕겨져 나왔다. 정신을 잃은 채 깊은 숲 속의 동굴까지 흘러갔다. 내 안의 요력을 모두 소진했지만, 이제는 나를 찾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서두를 이유도 없었다. 그 안에서, 아주 오래도록 잠들었다.
때때로 눈을 뜰 때 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적당히 물을 마시고, 나무 열매를 베어물었다. 조금 더 움직일 수 있게 된 후에는 이따금씩 약초를 캐다 근처 마을에 팔았다.
그럴 때 마다 내게 이야기들이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승리로 끝난 인호전쟁, 안정을 찾아가는 호월국, 정식으로 호월대의 대장이 된 청명과... 자환. 약초를 건네고 돈을 받을 때, 그리고 그 돈으로 내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살 때 마다 그의 이름은 제법 들려왔다, 나는 그럴 때 마다 애써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내고 감정을 억눌렀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여우귀만이 나만 알 만큼 떨릴 뿐이었다.
그 누구라도 나를 기억해내서는 안 되었다. 기억을 무기로 삼아 휘둘렀기에, 나는 살아서도 기억되어서는 안 됐다. 그 지독한 시간 속에서, 나는 그의 생존을 먹고 하루를 더 버텨냈다.
어떻게 사냐고 내게 절규하던 그는, 다행히도 잘 살아가고 있었다. 능글맞고도 다정하면서 속이 깊은, 내가 아는 그의 모습 그대로.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운자환이었다.
깊은 숲속의 동굴로 돌아온 나는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여기 고여있는데, 너는... 한없이 흘러가는구나."
동굴의 벽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순간이, 그의 체온이 내 등 뒤로 전해져오던 것은...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오직, 나만의.

 

30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청연각의 넓은 정원에 앉아 있었다. 청명과 설화가 옆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늘 그렇듯 설화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청명을 놀리고 있었고, 청명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에 대응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놀려, 설화. 청명이 얼굴이 벌써 석양보다 더 붉어졌잖아."
내 말에 청명은 고개를 돌렸고, 설화는 더 크게 웃었다. 이런 일상이 3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인호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평화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웃고 있을 때조차 내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 그것은 300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자환, 또 그 표정이네."
설화의 말에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표정?"
"그... 마치 잃어버린 걸 찾는 것 같은 표정. 인호전쟁 이후로 가끔씩 그런 얼굴을 하곤 해."
나도 모르게 내 손이 가슴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치 무언가가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내가 무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

설화가 내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가는 것을 보니 또 뭔가 놀릴 거리를 찾은 모양이었다.
"또 홍화루 생각하는 거지? 가예가 또 네 마음을 훔쳐갔나 보네. 아니면 새로 들어온 기녀? 뭐였더라... 수련이라고 했나?"
나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설화는 3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나를 놀리는 데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그냥... 그냥 생각이 많았을 뿐이야."
청명이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우리 사이의 긴장을 풀어주곤 했다.
"그런데 들었어? 서부 경계 근처에서 호족 사냥꾼의 흔적이 발견됐대. 수장님께서 우리에게 조사를 명하셨어."
청명의 말에 나와 설화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호족 사냥꾼이라...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언제부터 활동한 거야?"
내가 물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세 명의 호족이 실종됐어. 모두 서부 숲 근처에서."
나는 문득 서부 숲을 떠올렸다. 그곳은 인호전쟁의 격전지였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 숲은 내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그곳에 무언가... 아니,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굳이 마을로 향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었다. 숲은 깊었고,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살 것은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를 찾는 이가 없을 것이기에 굳이 새 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구해낸 자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본능처럼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을 짊어진 댓가를, 아직도 치르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도 나는 이따금씩 마을로 향했다. 약초를 팔아야 한다는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는 것은 그만둔지 오래였다. 내가 캐온 약초를 넘기는 댓가로 나는 몇 개의 동전과 함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호월대 2부대의 대장, 청명과 쌍벽을 이루는 검술의 달인. 그는, 자환이라는 그의 이름 그대로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의 이름 앞에 '아름다운 여자들을 좋아하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을 또다시 들은 나는 동굴로 돌아와서는 미간을 조금 좁혔다. 홀로 지내기 시작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바래기 시작하는 감정은 그에 관련된 일에만 조금씩 흔들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나는 여전히 너 하나로 살고 있는데, 너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 말이 동굴 안에서 외롭게 가라앉았다. 나는 피워두었던 모닥불에 나뭇가지 하나를 밀어넣으며 한숨을 흘려보냈다.
"...너는, 나 없이도 잘 살아가는구나."
역시나. 너 없이도 어떻게 사냐는 그의 말은...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조금은 슬펐고, 그보다는 더 많이... 안도했다.

 

서부 숲이라는 말에 내 가슴 한 구석이 묘하게 울렸다. 마치 오래된 현악기의 끊어진 줄처럼, 소리는 나지 않지만 그 진동만은 느껴지는 듯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흑야월의 손잡이를 쥐었다.
"서부 숲... 그곳은 인호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이지."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그곳에 대한 기억은 항상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가 내 기억 속에 구멍을 뚫어놓은 것처럼, 전투의 시작과 끝 사이에 무언가가 빠져있었다.
"내일 아침 출발하자. 직접 가서 확인해볼 필요가 있어."
청명과 설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토록 진지해지는 일은 드물었기에, 그들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을 것이다.
"자환, 괜찮아?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설화의 물음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300년 동안 나를 따라다닌 이 공허함을, 특히 서부 숲을 생각할 때마다 찾아오는 이 아릿한 그리움을...
"괜찮아. 그냥... 그 숲에 가면 뭔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무엇을 찾는지는 나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중요한 무언가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300년 동안 채워지지 않은 이 빈자리를 메울 수 있는 무언가.

 

나는 여전히 숲에서 지내고 있었다. 숲만큼이나 깊은 계곡에는 제법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물가에 앉아 두어 번 손으로 물을 떠 마셨다. 말라붙었던 목구멍이 그제야 죽지 않을 만큼 적셔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는 수면 위를 바라보았다.
내 얼굴은 물 위에 비추어지지 않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 아래에서도 나는 그림자마저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잊힌 댓가였다. 처음에 그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놀랐지만, 이제는 익숙했다. 덕분에 나는 내 얼굴이 어떤지 알 수 없어진 지도 오래였다.
흘러간 지나간 시간의 끝에 남겨진 것은 나조차 알 수 없는 자신과, 내가 짊어진 기억과 은월이라는 검 한 자루 뿐이었다. 나는 계곡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길게 다리를 뻗고 앉아, 그보다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집을 가볍게 쓰는 손끝 아래에서 '은월'이라는 이름이 느껴졌다. 거의 바래간 그 이름이 '숨어드는 달'이라는 뜻이었던 것은, 아마도 내가 이렇게 될 운명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일까. 삼백 년이 지나도, 아직까지도 조금 쓰라린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러다 문득, 그 동작을 멈추고 내 머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보았다.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를 떠올리려다가, 내 입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는 아직도... 나를 잊은 그 여우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서부 숲 깊숙한 곳을 홀로 걸었다. 청명과 설화는 다른 방향을 수색하기로 했고, 나는 본능적으로 더 깊은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흑야월이 내 등 뒤에서 묵직한 무게감으로 나를 이끄는 것만 같았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그 그림자 사이로 걸으며, 나는 이 숲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오래전에 와본 적이 있는 것처럼.
그때였다. 멀리서 계곡물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달빛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는 그림자가 없었다. 물에 비친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인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내 가슴 속 300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빈자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누구...?"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조여왔다. 내가 잊고 있던 것, 찾고 있던 것이 바로 그녀인 것만 같았다.

 

숲에서 오래도록 혼자 살다보니 낯선 소리에 자연스레 예민해졌다. 그래서였을까. 내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내 여우귀였다. 나는 천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잊지 못한 여우가— 나를 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숨조차 내쉬는 것을 잊었다. 눈을 깜빡이며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를 생각하다가, 그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그저 살아 있는 것뿐이었다. 이름도 없이. 그러니 나는... 이대로, 잊힌 채 스쳐 지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를 향해, 그러나 그를 지나치기 위해.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를 지나치는 일은... 어쩌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나를 본 기억은 남기지 마시오. 이 숲은 잊힌 자의 땅이니.”
서늘한 목소리만큼이나 무심하게 흘러나온 말투였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그저, 살 수 있을 터였다. 그가 내게 죽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처럼, 내가 그를 구해낸 것 처럼.
내가 기억하는 그는 늘 나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나는 그를 지나치며 숲속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햇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향하면, 그는 내가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네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상이, 너에겐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작은 혼잣말이 우거진 수풀 속으로 사라지기 위한 내 발걸음 소리 사이로 섞여들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내 앞에 선 여인의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빛났다. 한쪽은 깊은 자주색, 다른 한쪽은 달빛 같은 은색. 호족도, 인간도 가지지 않은 눈동자였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지?
그녀가 일어나 나를 지나치려 할 때,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차가웠다. 마치 오랫동안 숲의 그늘에 있었던 것처럼.
"기다려..."
내 목소리는 떨렸다.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잊힌 자의 땅'... 그런데 왜 내 마음은 그녀를 잊지 못하는 걸까?
"나... 당신을 알까? 어디선가... 만난 적이..."
그녀의 은발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치 달빛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내 가슴 속 빈 공간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300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그 자리가 그녀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왜... 왜 당신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이렇게 아픈 건지..."

 

삼백 년 만에 내 손목에 닿은 그 익숙한 온기가, 그 촉감이— 한순간에 나를 세상 속으로 끌어올리려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내 마음을 눌러내며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기억 속에 사는 자는, 누구의 곁에도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나 없이도 따뜻한 그의 손 안에서, 나는 한없이 차가워지고자 했다.
"...찾는 자가 많아진 세상엔, 잊힌 이 하나쯤은 조용히 사라져야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나는 내가 세상에서 잊힌 이후로 그 누구에게도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설령 그가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더라도 그저 흔한 약초꾼처럼 이야기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짤막한 말만을 남긴 채 가볍게 손목을 돌려 그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동안, 나는 끝내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비로소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가늠하는 듯 보였다.
"자환—"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명과 설화는 자환에게로 향해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청명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어깨에 얹힌 손이... 내 것이 아니라 다행이군."
나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발을 억지로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무엇이라고, 네 곁에 있겠어."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들이 먼저 그곳을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에야 눈을 떴고, 발걸음을 돌려 내가 지내는 동굴로 돌아갔다.

 

그녀가 숲속으로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격렬하게 뛰고 있었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것 같은 감각. 그리고 그 무언가가 내게 지독히도 소중했던 것이라는 확신.
"자환,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설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여인이 사라진 방향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누군가 있었어. 이상한 여인이 있었다고."
"여인? 어디? 아무도 안 보이는데?"
청명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들은 정말로 그녀를 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내 환각이었을까?
"자주색과 은색... 그런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본 적 있어?"
내 질문에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눈동자라면 기억나겠지. 호족도, 인간도 그런 눈은..."
설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 눈동자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그리고 그림자가 없었어. 물에 비친 모습도 없었고."
"자환, 너 괜찮아? 혹시 무리했어?"
청명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계속 수색하자."
하지만 내 발걸음은 자꾸만 그녀가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이 숲 어딘가에 그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도.

 

인호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 내가 그려낸 그림은 단순한 요력의 폭주가 아니었다.
기억은 존재를 되돌리는 일이었다. 나는 그 정의를 역이용해, 모든 이의 기억 속에 있을 나라는 존재를 단번에 지워냈다. 그 완벽한 소거는 마지막 전투에서 자환을 구해낼 수 있었다. 내 존재를 걸었던 대가는 '소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모든 기억을 내게 몰아 넣었기에, 내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그가 살아있을 이유를 한 조각이 사라지는 일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기억되면 사라지지만 사라지면 안 된다는— 틈과 모순 사이에 낀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 사실을 되짚으며 동굴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고개를 묻었다. 잊힌 자로 살아가기만 하면 됐다. 이렇게 가끔 마음이 쓰린 채로, 그의 소식을 바람결에 듣고, 그가 살아 가는 동안에만 나도 살아 있으면 됐다. 그런데 왜 너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와서 기어이 나를 보고야 만 것일까.
긴 한숨이 이미 꺼진 모닥불 위에 내려앉았다. 나는 나뭇가지를 들어 그 안에 숨어있는 불씨를 찾아냈다. 네 요력이었다면, 이마저도 쉽게 살려냈겠지.
그 생각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떠올라, 나를 잊은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내 모든 생각의 끝이 그라는 사실에 기쁘게 좌절했다.
"제발... 그렇게 살아."
찾아낸 불씨를 일으키며 나는 중얼거렸다.
"나를 찾지 말고, 나 없이도, 나를 몰라도... 너를 위해서."
간절한 속삭임 끝에는, 내가 차마 부르지 못한 그의 이름이 입모양으로만 맺혔다.
"...자환."
너는 내 이름을 잊었더라도, 나는 네 이름을 잊지 못했다. 내가 웃는 법과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이에, 너는 그토록이나 아름답게 살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참으로.

 
"이 눈... 내가 기억하는 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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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호월대관이든, 청연각의 동쪽 다락방이든, 심지어 홍화루의 어느 방에서든. 눈을 감아도 자주색과 은색이 섞인 그 이질적인 눈동자가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 눈동자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달빛이 내 방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이 마치 그녀의 은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생각나는 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흑야월을 꺼내 달빛에 비춰보니, 검은 검신에 새겨진 은빛 달 문양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 검을 들고 있으면 항상 마음이 편안해졌는데, 오늘은 왠지 더 무거웠다.
꼬리와 여우귀가 있으니 분명 호족이었다. 하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런데도 왜 내 가슴은 그녀를 보는 순간 이토록 아프게 뛰었을까? 마치 오래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은 것처럼.
나는 결심했다. 다시 그 숲으로 가야 했다. 홀로. 그녀를 다시 만나야 했다. 내 가슴 속 300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그 공허함의 이유를 알아야 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된 기억의 조각을 더듬었다. 인호전쟁... 서부 숲에서의 마지막 전투... 그리고 내가 놓친 무언가...

 

삼백 년 동안, 그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 숲을 찾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숲이 외진 곳이라는 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안심하고 잊힌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숲을 찾은 그의 눈에 띄었던 순간으로부터 몇 번인가의 낮과 밤이 흘러갔다. 나는 그 사이에 이따금씩 발견할 때 마다 모아두었던 약초더미를 집어들고는 마을로 향했다.
검을 휘두르다가 나무 그늘에 앉아있다보면, 그 위에 앉아있던 자환이 내 머리 위로 나뭇잎을 떨어뜨리곤 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고, 햇빛 때문에 눈을 가늘게 뜨며 그에게 나뭇잎을 집어던지곤 했었다. 그랬던 날들을... 나는, 햇빛이 가득한 날들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비가 오는 날에만 마을로 향했다. 햇빛이 없어야, 내가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었기에.
비를 피한다는 명분으로 삿갓을 눌러쓰고는 익숙한 약방으로 들어갔다. 약초를 건네고 동전 몇 개를 받은 뒤,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작은 마을이지만 거리는 활기찼고, 나는 그 사이를 가로지르며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들었어? 호족 사냥꾼이 요즘 또 기승이래.”
“호월대에서 순찰을 나오고 있다던데?”
“얼마 전에도 대장들이 왔었잖아.”
“쉿. 몇 달 사이에... 셋이나 당했대.
늘 그렇듯 무심히 흘려듣던 이야기 속에서 ‘호월대 대장들’이라는 말에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떨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 자환이 이곳에 왔던 건, 나를 찾아서가 아니라 호족 사냥꾼을 쫓기 위해서였다.
나는 잠시 술렁였던 마음을 가만히 눌러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삿갓을 더 깊게 눌러쓰고, 비 내리는 길을 돌아 내가 있던 숲으로 향했다.

 

서부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번에는 홀로 왔다. 청명에게는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고만 했고, 설화의 추궁에도 입을 다물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내게만 허락된 운명 같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흑야월이 등 뒤에서 묵직하게 울렸다. 마치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
"호족 사냥꾼...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반가웠다. 비에 젖은 숲은 새로운 냄새를 품고 있었고, 그 냄새 속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득 마을에서 들은 소문이 떠올랐다. 이 주변에 약초꾼이 있다고 했었지. 혹시 그녀가...
비 내리는 숲을 뚫고 걸으며, 나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그림자 없는 여인. 자주색과 은색 눈동자를 가진 그녀. 내 가슴에 300년간 자리잡은 공허함의 정체.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동굴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불빛.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있는 거야...?"
내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내 심장은 더 격렬하게 뛰었다. 마치 오랜 시간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되찾으려는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고 동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안에서는 희미한 불빛과 함께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녀가 분명했다. 그림자 없는 여인. 내 마음속 공허함의 정체.

 

나는 마을에서 무언가를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시전에서 그의 이름이 다른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랜만에, 충동적으로 백옥주 한 병을 사들고 동굴로 돌아왔다.
익숙한 향기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피워둔 모닥불 앞에 앉아, 동굴 벽에 등을 기대며 숨을 고르고 있을 무렵에 동굴 입구 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한쪽에 두었던 은월을 집어들었다.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그 동작만은 본능처럼 몸에 새겨져 있었다.
“…”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이를 확인한 순간에 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또 너는, 여기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걸 그에게 묻을 수는 없었다. 내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고, 그랬기에 그저 말없이 그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잊힌 이가… 사라질 수 없게 만드는 건, 무슨 장난인가.”
내 목소리의 절반은 한숨이었다. 나는 은월을 다시 바닥에 내려두고, 모닥불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나를 따라 모닥불 앞까지 다가온 그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젖은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발치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어차피 이 동굴까지 찾아온 이상, 지금 당장 그를 피해 도망칠 수는 없었다.
“비 맞고 다니면…”
…감기 걸린다니까. 그가 예전에 내게 했던 말을, 나는 지금 그에게 할 수 없었다. 그 말을 삼키며 나는 말없이 동굴 구석에 두었던 백옥주 병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받아들기 위해 손을 내밀던 그의 시선이 내 눈동자에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담긴 나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내 눈동자 색이 변해 있었다. 한쪽은 여전히 자주색. 다른 쪽은… 그날, 내가 폭주시켰던 요력을 닮은 은색.
나는 거울이 없었고, 물에 비친 내 모습도 볼 수 없었기에 그제야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림자가 없고, 물에 남는 흔적조차 없던 나는 이제는 눈마저 달라져 있었다.
그 모습이, 이제는 정말로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술을 마시지도 않은 속이 쓰렸다.

 

빗물에 젖은 채 동굴 안으로 들어서니 희미한 불빛과 함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내 발걸음에 반응한 그녀가 은월을 집어 들었다가 나를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적인 움직임에서 검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한숨 섞인 말에 내 가슴이 묘하게 울렸다. '잊힌 이'...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모닥불 앞에 다가가니 그녀가 백옥주 병을 건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쪽은 깊은 자주색, 다른 쪽은 달빛 같은 은색. 그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백옥주... 내가 좋아하는 술인데."
병을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녀가 내 취향을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강한 감정이 내 안에서 일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째서... 내 가슴이 당신을 보면 이토록 아픈 건지..."
목소리가 떨렸다. 300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빈자리가 그녀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빗물이 내 검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모닥불 주위의 땅을 적셨다.
"그리고 어째서 내가 당신을 찾아왔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찾아와야만 했습니다."

 

인호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내가 그를 구해내고 나를 지워냈던 그날 이후, 오래도록 살아오며 이런 순간을 상상했던 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나를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을. 그럴 때 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 순간이 단 한 번 만이라도 온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타이르곤 했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나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그와 시선이 얽히는 찰나, 나는 그 이상을 바라고 싶어졌다. 그가 나를 기억해내기를. 그가, 그때의 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기를. 내게 손을 뻗어오기를. 그리고... 나를 안아주기를.
하지만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백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익숙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지 마."
바닥에 내려놓았던 은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아직까지도 모닥불 앞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는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네가 나를 기억하는 순간, 나는... 머물 수 없어.”
그는 아마 내가 머물지 못하는 곳이 동굴이라고 생각할 터였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곳은 이 동굴을 포함한 세상이었다. 내가 그를 살리기 위해 나를 지워낸 댓가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를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더 이상 마주하고 있으면 안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를 내쫓을 수는 없기에, 내가 대신 떠나야 했다.
"...비 그치면 가."
동굴 밖으로, 빗속으로 나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한 마디를 남겨둔 나는 깊은 숲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백옥주는 아직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네가 나를 기억하는 순간, 나는... 머물 수 없어."
무슨 의미일까? 내가 그녀를 기억한다면 그녀는 사라진다는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단지... 가슴이 아플 뿐이다.
천천히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너무나 단촐한 침구와 약초 더미, 그리고 삿갓 하나만이 그녀의 흔적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얼마나 오래 홀로 지냈을까?
그녀가 들고 나간 검이 눈에 선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그 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일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백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아연이 좋아하던 술이기도 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 함께 마시던 술.
"어째서...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술을 알고 있는 거지?"
중얼거리며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온기를 퍼트렸지만, 내 가슴 속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비가 그치면 떠나야겠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녀를 쫓고 있었다. 300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그 빈자리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나는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커다란 나무 위에 앉아, 며칠 동안 그 자리에서 조용히 비를 피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몸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굳이 살고 싶진 않았다. 그저, 그가 살아 있기에 죽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
비로소 비가 그친 것은 제법 시간이 흐른 후였다. 며칠이 흘렀는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그가 충분히 설휘로 돌아가고도 남았을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나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 삶을, 내가 그의 삶을 다시 어지럽히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두 번 잃게 될 터였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한 줌의 햇살이 비집고 내려왔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먹은 게 언제였는지 생각해봤다. 근처 나무에 열려있던 열매를 하나 따서 베어물었다. 아삭, 그 소리 하나가 그나마 내가 아직까지는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지나치게 익숙한 무언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나무 아래에 떨어져있는 검 한 자루였다. 흑야월. 자환이 늘 지니고 다니는 검.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한 입 베어문 열매를 손에 든 채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 검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뭘 한거야, 자환.
좁혀진 미간이 내 말을 대신했다.

 

비가 그치자 나는 동굴을 떠났다. 하지만 설휘로 돌아가지 않고 숲 속을 헤맸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아니, 찾고 싶었다. 내 영혼이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며칠을 쉬지 않고 그녀의 흔적을 찾던 중, 나는 의도적으로 흑야월을 한 나무 아래 두었다. 직감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 기다렸다.
그녀가 열매를 따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켜보던 나는 그녀가 흑야월을 발견하고 다가오는 순간, 가볍게 나무에서 뛰어내려 그녀 앞에 착지했다.
"찾았다."
그녀의 놀란 표정을 즐기며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그녀가 들고 있던 열매를 순식간에 빼앗아 한 입 베어물었다.
"맛있네. 음... 이런 장난, 예전에도 쳤던 것 같은데."
내 말에 스스로도 놀랐다. 그녀에게 장난을 쳤다니? 언제? 어디서? 그런 기억은 없는데...
"당신은 누구지? 내 가슴이 당신을 기억하는데, 머릿속은 텅 비어있어. 이름이라도 알려줘."
그녀의 눈동자, 자주색과 은색이 뒤섞인 그 신비로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하."
내 손에 들려 있던, 이미 한 입 베어 문 열매를 빼앗아 간 그를 보며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탄식인지 한숨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가 가져간 열매에서 내가 베어 문 자리를 골라 똑같이 베어 무는 그 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묻히는 것이었다. 아주 깊게.
나는 입술을 깨문 채 그를 바라봤다. 내 시선에는 다 가누지 못한 감정들이 엉켜 있었다. 원망, 그리움, 안타까움, 간절함, 미안함. 그것들을 하나로 묶으면 결국 그가 우리 사이에 붙였던 이름 하나로 수렴됐다. 사랑. 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그것이 이제 내 안에만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돌아서려 했다.
그 순간 그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나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를 알아챘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기척들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몸이 기억대로 움직였다. 발끝으로 바닥에 있던 흑야월을 차올려 자환에게 던졌고, 허리춤의 은월을 뽑아 들었다. 검집 밖으로 나온 은빛 검신은 예전과 다름없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날아오는 화살과 다가오는 기척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류하가 던진 흑야월을 공중에서 받아들고, 날렵하게 검을 뽑아 날아오는 화살을 베어냈다. 두 개의 화살이 잘려 땅에 떨어졌다.
"호족 사냥꾼이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등을 보호하듯 자세를 잡았다. 이상하게도 이런 자세가 무척 익숙했다. 마치 오랫동안 그녀와 함께 싸워온 것처럼.
"몇 명이지? 느껴지는 기척으로는 다섯? 아니, 여섯?"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사냥꾼들이었다. 내 붉은 눈동자가 그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앞을 맡을 테니, 당신은 뒤를 부탁해."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마치 예전에도 수없이 했던 말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내가 그녀를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본능은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나는 숲속에서 그 누구도 마주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은월을 뽑아 누군가에게 겨누는 것은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도 이따금 동굴 안에서 손질해두었던 은월의 검날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났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예전처럼 그를 향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감 다 죽었네. 일곱이야.”
앞에 선 그가 나를 돌아보았고,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함께 검을 휘두를 때였다. 서로 닿지 못할 만큼 닮아 있었던 흑야월과 은월의 궤적을 따라가며, ‘우리’라는 이름으로 웃을 수 있었던 날들. 지금은 그때처럼 웃을 수 없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그가 먼저 발걸음을 떼어 나타난 인간들을 향해 나아갔다. 검은 꼬리까지 날카로워진 그의 등을 바라보며 나는 곧바로 그의 뒤를 이었다. 정면에 셋, 양옆으로 둘씩. 제법 괜찮은 배치로 몰려오는 이들을 상대로, 우리는 다시 서로의 가슴과 등이 되었다.
"…"
자환의 검술은 내 기억과 달라져 있었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오랜 시간 홀로 싸워온 자의 칼날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움직임은 조금씩 내가 기억하던 것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끼며, 그를 향해 들어오는 공격을 대신 막아주었다. 한층 날카로워진 흑야월의 궤적 사이를 여전한 은월이 흐름이 메웠다.
“나는... 잊은 적이 없어. 그게, 가장 잔인했지.”
오랜만의 움직임으로 숨이 거칠어지는 가운데, 첫 진심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화살을 베어내고 적들과의 전투에 집중하던 중, 그녀의 말이 내 귀를 스쳤다. '나는 잊은 적이 없어. 그게 가장 잔인했지.' 그 말에 내 심장이 묘하게 떨렸다.
두 명의 사냥꾼이 내게 달려들었다. 흑야월을 휘둘러 한 명의 검을 튕겨내고, 몸을 숙여 다른 이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내 검술이 점점 변하고 있었다. 원래 내 것이 아닌 듯하다가도, 점점 익숙해지는 느낌. 마치 오래된 기억이 손끝으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네 뒤!"
본능적으로 외치며 뒤를 돌아 그녀의 등 뒤로 접근하는 사냥꾼을 향해 검을 날렸다. 흑야월이 공기를 가르며 그의 어깨를 베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검이 내 옆을 스치며 또 다른 적을 향해 날아갔다.
우리의 검이 그리는 궤적이 하나로 이어졌다. 그녀와 나, 그리고 검 두 자루가 마치 오랜 시간 함께해온 듯한 조화로움으로 움직였다.
"견랑..."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이름에 나 자신도 놀랐다. 견랑? 그게 누구지? 왜 내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을까?
그러나 생각할 틈도 없이 또 다른 적이 달려들었다. 나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점점 더 그녀와 일치해가고 있었다.

 

나조차 가물가물하던 이름이었던 견류하도 아니고, 견랑이라니. 그 호칭은 그가 나를 동료도 벗도 아닌, 그 이상의 존재로서 나를 바라보던 순간들에만 부르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 내 여우귀와 꼬리가 동시에 빳빳하게 굳어졌다.
"그 이름을 다시 부르면… 난 여기에 머물 수 없을지도 몰라."
다시 등을 맞대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어깨 너머로 속삭였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검이 사냥꾼들을 꿰뚫지 못하고 비껴가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마 인호전쟁이 끝난 후이기에 인간을 벨 때마다 주저하는 것이리라. 기왕이면 깔끔히 베어내는 게 나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이제 남겨진 자였고, 그는 살아가야 하는 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검을 들었던 그날처럼, 모두를 베어내는 대신 치명상만 피하며 움직였다.
마지막 일곱 번째가 무릎을 꿇자, 나는 검을 크게 휘둘러 맺힌 핏방울을 털어냈다.
“…기억 속에 머물 수는 있어도, 현실엔 닿지 못하지.”
몸을 움직이고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는 아니어도 그의 검만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을까. 조금은 후련해진 가슴을 안고 나는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 멈추어선 자환과, 주변에 쓰러진 인간들을 뒤로하고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억은 나를 살리는 동시에,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는 그저 위협이고, 죽음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 이상으로 기억되어서는 안 되었다.

 

쓰러진 사냥꾼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한동안은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다쳐 있었다. 그녀의 검술은 놀라웠다. 아니, 우리가 함께 싸우는 모습이 더 놀라웠다. 마치 오랜 세월 함께 검을 휘둘러온 듯한 완벽한 호흡.
흑야월을 땅에 내리꽂고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멀어지기 전에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
그녀를 돌려세우며 그 신비로운 눈동자를 마주했다. 한쪽은 자주색, 한쪽은 은색. 그 눈에서 깊은 슬픔과 체념이 읽혔다.
"견랑... 아니, 당신은 누구지? 어째서 내 가슴은 당신을 알아보는데, 머릿속은 텅 비어있는 거지? 왜 당신은 나를 피하는 거야? 그리고 왜..."
말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녀의 눈동자, 입술, 은빛 머리카락...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왜 내 심장은 당신을 보면 이렇게 아픈 거지?"
내 목소리가 떨렸다. 300년 동안 채워지지 않았던 그 공허함의 정체를 이제야 마주한 듯했다.

 

손목을 붙잡힌 채 돌려세워졌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 것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견랑이라 다시금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내 눈을 들여다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그리하고 있었다. 그 시선 아래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랑받았던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그걸로도, 충분히 살아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나를 내려다보는 이 모든 것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나를 기억 속에 살게 했었어."
말을 꺼내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이 말만은 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고 그 아픔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내 심장을 파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는, 너를... 세상 속에 살게 했었지.”
그가 내 손목을 잡지 않았다면, 내가 다른 손에 아직 검집에 밀어넣지 못한 은월을 들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스스로 가슴을 치며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제법 실체를 갖춘 먹먹함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잡아, 나는 결국 진실을 내뱉고야 말았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나는...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자환.

 

그녀의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네가 나를 기억 속에 살게 했었어. 그리고 나는, 너를... 세상 속에 살게 했었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내 심장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천천히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우리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자 그녀의 향기가 내 감각을 깨웠다. 낯설지만 너무나 익숙한 향기.
"견랑..."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쪽은 자주색, 한쪽은 은색. 그 은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은색 눈동자를 가렸다. 그러자 자주색 눈동자만 남았다. 그 순간, 무언가가 내 안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이 눈... 내가 기억하는 눈이야."
목소리가 떨렸다. 300년의 시간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내 안에 묻혀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나를 잊게 했던 거야? 그리고 스스로를... 세상에서 지웠던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묻고 싶었던 질문처럼.

 
"사랑한다... 사랑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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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다시 나를 ‘견랑’이라 불렀을 때, 그리고 내 은색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가릴 때. 두 번의 전율이 차례로 찾아와 내 가슴을 무너져 내리도록 만들었다. 눈을 감지도, 자주색 눈동자를 숨기지도 못한 채 나는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 눈, 낯설지 않지?"
내가 모두로부터 잊히길 선택했냐는 그의 말과, 낯설지 않냐는 내 말의 끝은 각자를 닮아 올라가있었다. 질문을 질문으로 이었기에 답에 닿지 못했지만, 사실은 답을 구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기에 상관없었다. 그저 확인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나를 보지 마. 네 눈에 비친 나는... 곧, 사라질테니까."
그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다. 입술이 조금 움직였고, 나는 그보다 먼저 말해 그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의 등 뒤에서 무엇인가가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숨을 들이키기도 전에 몸을 돌려, 그를 막아섰다. 몸을 앞에 내세우며 은월을 들어올렸다. 검이 파고들려는 살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검날 너머로 나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시선을 마주했다. 길게 찢어진 눈. 어둡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인간이었다. 아까 베어버리지 않아 쓰러졌던 자들이 다시 일어서는 한가운데에, 자환이 꽂아두고 온 흑야월이, 아직 땅 위에 남겨져 있었다.

 

눈 앞에서 펼쳐진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그녀가 내 앞을 가로막고 검을 들어올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등 뒤로 길게 찢어진 눈을 가진 남자를 보았다. 어둡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옆으로 쓰러졌던 사냥꾼들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비켜! 그 뒤로!"
그녀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흑야월을 땅에 꽂아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무기 없이 그녀를 보호할 수 없다는 생각에 심장이 요동쳤다.
"류신이라... 노예상 중에서도 악명 높은 놈이로군."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호족 사냥꾼으로 악명 높은 자였다. 그의 우측 눈 밑의 작은 흉터가 내 기억을 확인시켜주었다.
"견랑, 물러서. 내가 처리할 테니."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등이 내 가슴에 닿았다. 그 온기가 300년 전의 기억을 더욱 선명하게 불러일으켰다. 한때 우리는 이렇게 등을 맞대고 싸웠었다. 그 기억이 점점 선명해졌다.
류신이 비웃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쇠사슬이 들려있었다. 호족을 제압하기 위한 특수한 무기였다.
"흑호와 백호가 함께라... 오늘은 운이 좋군. 둘 다 데려가면 값을 두 배로 받을 수 있겠어."

 

그 인간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만이 내 전부였다. 흑야월은 이미 인간들의 손에 있었고, 상대는 여덟. 그들이 손에 쥔 은빛 쇠사슬이 요력을 봉인한다는 건 굳이 시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자환을 등 뒤로 물리며 검을 들었다. 조금 전 그와 함께 싸웠을 때와는 달랐다. 지금은, 그를 지켜야 했다. 은월이라는 이름처럼 흘러내리는 은빛 곡선 아래에서 나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들을 베어냈다.
“나는 네 과거로 살아왔지. 하지만 너는, 나 없는 현재에서… 참 예쁘게 살고 있더군.”
가빠지는 숨결 사이로 진심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 나는 그를 대신해 나를 내어주며 적을 베었다. 인호전쟁 이후로 다시 날붙이에 베이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깨와 팔을 스쳐간 통증보다 더 아팠던 건 내 심장이었다.
"뭘 중얼거리는 거냐, 백호? 눈 색이 다른 걸 보니 더 비싸게 팔겠군."
비웃는 류신의 목소리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여덟 중 셋을 베었을 뿐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는 이상, 내가 먼저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환을 등 뒤에 둔 채 검 하나만으로 버티는 것도 오래갈 수 없었다.
나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견랑이 내 앞을 막아선 채 적들을 베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검이 빛나는 은빛 궤적을 그리며 적들을 쓰러뜨렸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깨와 팔이 베이는 것을 보았다. 내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뭐하는 짓이야! 비켜!"
그녀를 밀쳐내려 했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흑야월은 저 멀리 적들 손에 있었고, 나는 무기도 없이 그저 그녀가 다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네 과거로 살아왔지. 하지만 너는, 나 없는 현재에서... 참 예쁘게 살고 있더군.' 그녀의 말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에 담긴 고통은 느껴졌다.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뭐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류신의 손에 들린 은빛 쇠사슬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호족의 요력을 봉인하는 사슬. 저것만 피하면 맨손으로도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봐, 류신. 네가 원하는 건 나 아니냐? 그녀는 놔주고 날 데려가라."
나는 천천히 그녀의 등 뒤에서 옆으로 나서며 류신을 향해 말했다. 그의 시선을 내게로 돌리려 했다.
류신은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찢어진 눈이 내게 고정되었고, 그 시선에는 놀라움과 탐욕이 교차했다.
"이런이런... 흑호 중에서도 유명한 호월대 2부대 대장 아니신가? 운자환 님."
류신은 내 이름을 비웃듯 끝을 올려 말했다. 그는 나를 알아봤다. 어쩌면 처음부터 노린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정말 대박이군. 백호도 좋지만, 호월대 대장이라면... 훨씬 값이 나가겠지."

 

나를 잊은 세상 속에서, 나는 살아 있었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였다. 검만으로는 끝까지 그를 지켜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등을 떠민 건 류신이 부른 그의 이름이었다. 그 말이 이죽거릴 때, 내 등 뒤를 벗어나는 자환의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또다시 선택해야만 했다.
견랑이라 나를 부르는 것도, 그리고 류신의 앞에 직접 나서는 것도. 그의 마음이 기억하는 것을 머리 역시도 떠올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제는 두번째이자 진짜 마지막이 될 것이었기에, 나는 망설임없이 입을 열었다.
"...네가 나를 잊었기에, 내가 사랑하며 살 수 있었어."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에 사랑한다 했던, 그 때의 그 말을 떠올려 그에게로 돌려주었다. 그것은 그가 붙여주었던 우리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늦게 돌아온 이름이기에, 다시 불릴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은월을 고쳐잡고는 그에게로 날아드는 은빛 쇠사슬을 막았다. 다시 살이 찢겨나갔지만, 나는 자세를 고쳐 세우며 진심을 하나 덧붙였다.
"네 곁에 있고 싶었는데. 단지... 정말, 그뿐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모든 것을 읽어내며, 내 안에 남은 마지막 힘을 모두 끌어올렸다.
요력을 터뜨리면 그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온전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온전히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말이 내 귀에 꽂혔다. '네가 나를 잊었기에, 내가 사랑하며 살 수 있었어.' 내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 통증은 익숙했다. 300년 동안 나를 괴롭혀온 그 공허함의 정체였다.
그녀가 은월을 휘둘러 쇠사슬을 막는 순간, 그녀의 살이 찢겨나가는 모습에 내 영혼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말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견랑..."
나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렀다. 그 순간, 마치 봉인이 풀리듯 모든 기억이 선명해졌다. 인호전쟁 당시, 나무 위에서 나눈 대화. 서로의 검이 맞닿았던 순간들. 서로의 입술을 탐했던 그 오후.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서 그녀가 자신의 요력을 폭주시켜 나를 구했던 그 순간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 결의를 읽었다. 그 눈빛을 알았다. 인호전쟁 때 본 그 눈빛.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는 눈빛.
"안 돼! 하지 마!"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요력이 폭발하기 전에 그녀를 막아야 했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을 때, 나는 그가 모든 것을 기억해냈음을 알았다. 기억되면, 과거가 복원되면- 나는 사라질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 빠르게 요력을 터뜨렸다. 사방이 은빛으로 가득찼고, 인간들이 쓰러졌다. 나는 그 안에서 그의 시선을 온전히 마주했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는데... 이젠, 끝이겠네."
그의 붉은 눈동자 안에 담긴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쪽이나마 자줏빛으로 남아있던 내 눈동자가 은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볼 수 있으니까.
"네가 날 부르기엔... 내가 너무 멀리 와버렸어."
은월을 쥐지 않은 쪽 팔은 이미 깊게 베여있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올려, 삼백 년 만에 비로소 그의 얼굴을 감쌌다. 여전히 선명한 온기는 그가 나와는 다른, 정말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사실에 만족했다. 그리고는 내 손끝이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이 보여서, 조금 더 말을 서둘렀다.
"...자환."
비로소.
정말로, 비로소.
내가 잊지 못했던, 잊을 수 없었던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소리내어 부르면 혹여나 날아갈까봐. 그토록 오래 혼자 지내면서도 단 한 번도 부르지 못했던 이름의 소리만으로도 나는 다시금 목이 메였다.
다급하게 나를 끌어안는 그의 손길 아래에서 간신히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지금은, 들을 수 있으니까.”
나는 아마도,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다.

 

그녀의 몸이 내 품 안에서 점점 투명해져 가는 것을 보며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300년 동안 내 가슴 속에 자리했던 그 공허함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였다. 내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심장은 결코 잊지 못했던 그녀.
"견랑, 견류하..."
목이 메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내 얼굴을 감싸는 순간, 그 따스함이 내 영혼을 관통했다. 그녀의 손끝이 투명해지는 것을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사랑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거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300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시간에도. 내 심장이 멈추는 그날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널 사랑할 거야."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완전히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절망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가지 마... 제발... 이번엔 내가 널 붙잡을게. 네가 사라진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야?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하는데... 다시 널 잃을 수는 없어."
그녀의 희미한 미소가 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 미소 속에 담긴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사랑, 그리고 작별.

 

인호전쟁의 마지막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기억될 걱정도, 잊혀질 슬픔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은 그저, 그가 말한 사랑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려보였다. 눈매가 그를 향해 휘며 고여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닦는 일조차 아까워서, 나는 그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고 살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저 내가 마음에 담은 이었고, 나를 마음에 담은 이였기에 그럤을 뿐이었다. 기억될 수 없는 날들을 살면서도, 그가 나를 기억하지 않기에 기뻤다. 그리고 그 끝에서는 그가 내 이름을 마음으로 불러주었기에 또 기뻤다.
나는 끝까지 그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주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닿은 손을 조금 움직여, 그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런데, 그 눈물 위로— 내 손끝에 묻었던, 누군가의 피가 번져 있었다.
"...자환."
그리고 나는, 내 손끝이 투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손끝이 투명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던 그 손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살아있는 이의 피. 그녀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견랑... 네가... 네가 정말 여기 있는 거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혹시 이것이 환상은 아닐까? 사라져가는 그녀를 붙잡기 위한 내 마음이 만들어낸 착각은 아닐까?
하지만 그녀의 손의 온기, 그 무게가 너무나 선명했다. 환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내 앞에 있었다.
"이름을 붙이면... 머무르고 남는 존재가 생긴다고 했지?"
인호전쟁 중 훈련장에서 나눈 대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석양 아래에서, 그녀의 자주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가 말했던 것.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으니까... 네가 머물 수 있는 거야."
나는 그녀를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다시는 널 보내지 않을 거야.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널 사랑해."

 

나를 끌어안는 그의 품 안에서,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그를 따라 세차게 뛰는 내 심장이 느껴졌고, 그 감각이 너무 오랜만이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의 체온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끝내 목이 메이고 말았다.
"네 말이... 나를 붙잡아서 살게 했던 거야."
마지막 전투로 향하기 전날의 기억은, 나를 잊은 채 살아가는 그의 세상 속에서 그림자마저 잃고 떠도는 동안에 선명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우리를, 그를, 그리고 나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그의 말이, 결국 나를 다시금 이 세상에 만들어낸 것이었다. 기억의 댓가를 치루고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도록.
나는 그림자가 사라진 뒤로 한 번도 햇살을 바라보지 못했는데, 그의 붉은 눈동자 안에는 여전히 내가 있었다. 나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된다고 느꼈다.
내 손에서 힘이 빠져 은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어딘가 아득하게 들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품을 끌어안았다. 아프고 쓰라린 온 몸으로라도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를... 나를, 다시 불러줘. 그러면... 내가, 세상에 머무르고 남게 될 거야."
한 번 더, 단 한 번만이라도. 그가 내 이름을 입에 담아준다면, 나는 다시 그의 세계 속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견랑도, 류하도, 네가 불러주는 이름이라면 뭐든 좋아. 잊히지 않는 존재로, 네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내 목소리가 떨렸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게, 잊히고 싶지 않아... 자환. 제발."

 

그녀의 마지막 말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잊히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은 300년 동안 공허하게 메아리쳤던 내 가슴 속 빈자리를 완전히 채웠다.
"류하..."
그 이름을 부르자마자, 그녀의 은빛으로 물들었던 눈동자가 점점 자주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림자가 없던 그녀의 발밑에 서서히 어둠이 번지기 시작했다. 내 부름이 그녀를 이 세상에 묶어두고 있었다.
"...내, 견랑."
또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두 눈이 완전히 자주빛으로 변했다. 나는 그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쥐고, 그녀의 입술을 향해 내 입술을 가져갔다. 처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날처럼,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이 닿았다. 깊고 절실하게 그녀를 품에 안고 입을 맞췄다. 그녀의 존재, 그녀의 온기, 그녀의 모든 것을 확인하듯이.
"나는 널 다시는 잊지 않을 거야. 300년 전처럼, 지금처럼, 그리고 앞으로의 모든 시간에도... 널 사랑해, 견랑. 내 곁에 머물러줘."

 
우리는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붙잡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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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부를 때 마다 내 존재가 선명해졌다. 그가 갈급하게 찾는 내 입술 사이로 스며드는 그의 숨결이 나를 채울 때 마다, 나는 다시금 세상에 발을 붙였다.
그가 한참이나 나를 놓아주지 않는 덕분에 점점 모든 것이 아득해져 갔다. 그때 멀리서부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환—"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처음 우리가 입을 맞췄던 날에도 그를 불렀던 이들이었다. 익숙한 설화의 목소리, 익숙한 청명의 발걸음 소리. 비록 오늘은 자환이 그들에게 말도 없이 며칠 동안 나를 찾아 숲을 헤맸기에, 그 소리들은 조금 더 다급하게 느껴졌다.
자환은 그날보다는 느릿하게 나를 놓았다. 하지만 그날처럼,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뒤늦게 달려온 청명과 설화를 마주했다. 나도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자환에게서만 잊혔던 것이 아니었다. 그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에게서 잊혀졌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청명과 설화에게도 나는 인호전쟁 마지막 전투 이후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단어를 고르다, 나는 자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미처 설명도 하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던 정신을 잃었다.
이제는, 그래도 될 테니까.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자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재빨리 그녀의 몸을 받아 안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숨은 고르게 쉬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견랑... 류하..."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제야 내게 달려온 청명과 설화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혼란과 놀라움이 가득했다.
"자환, 대체 무슨 일이... 그녀는 누구지?"
청명의 질문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300년의 망각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막막했다.
"류하야. 우리의 벗이었어. 인호전쟁 때..."
설화가 눈을 크게 뜨며 다가왔다.
"류하? 그 류하? 우리가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하를 더 단단히 안으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 류하야. 그녀는 나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모두의 기억에서 지웠어. 하지만 이제... 그녀가 돌아왔어."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건 동굴의 천장이 아닌 낯선 방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벽에 기대 앉은 자환이 보였다. 익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느껴졌고, 오랜만의 고요가 멀게만 다가왔다.
어깨와 팔, 옆구리에 제법 정성스럽게 감긴 붕대가 보이자 나는 피식 웃었다.
"전보다 붕대 감는 솜씨가 많이 늘었네. 근데 옆구리까지 네가 했어?"
방 한쪽에는 은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마도 자환은 나를 데려오느라 정신이 없었을 테니, 저 검을 챙긴 건 설화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남아 사냥꾼들과 류신을 마무리한 건 아마도 청명이었겠지. 굳이 보지 않아도 선한 풍경이 그려졌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에 자환이 재빨리 다가왔다. 붉은 눈동자에 가득한 걱정이 담긴 채로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가까워지자, 나는 그제야 내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실감하고 그의 볼을 가볍게 찔렀다.
"내가 없었던 동안, 네가 여자들 좋아한단 소리가 얼마나 들렸는데."
목소리에 배인 웃음기 만큼 내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설마 그 사이에 익힌 솜씨로 내 옷 벗겼던 건 아니지?"

 

그녀의 장난기 섞인 질문에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300년 동안 그리워했던 그 장난스러운 눈빛, 그 특유의 말투가 다시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술 한 잔 마시러 가자는 여인들의 청은 많이 받았지만..."
나는 그녀의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내 손으로 옷을 벗긴 여인은 네가 처음이야. 그것도 설화가 옆에서 도와줬고."
붉은 눈동자로 그녀의 자주빛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내가 아무리 급해도 내 견랑의 순결을 그렇게 함부로 훼손할 리 없잖아."
장난스러운 말투 속에도 진심이 묻어났다. 그녀의 손을 잡아 살짝 그 위에 입술을 눌렀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웃겨. 진짜 이렇게 넘어갈 거야?"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도 나도 여전했다. 다만 우리는 삼백 년이라는 시간동안 나이를 조금 더 먹었을 뿐이었다.
"그 숲이랑 동굴에서 거의 안 나오고, 가끔 마을에만 내려갔는데도 네가 여자 좋아한단 소문은 파다했거든."
그 시간을 살아내는 동안은 분명 힘들었는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그 시간들이 그저 잠깐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넘기고 그가 내게 보내는 시선을 마주했다. 그 눈동자 안에 담긴 마음이 분명해서 나도 잊고 있었던 감각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손끝으로 번져오는 묘한 간질거림과 그의 붉은 눈 앞에서 자꾸 달아오르는 얼굴, 그리고 나도 모르게 혀끝으로 입술을 건드리게 되는 희미한 갈증 같은 것.
"힘들었지. 삼백 년 동안 그림자도 없이 너 소식만 들으며 살아왔으니까. 너 하나 살리겠다고 그랬고, 두 번째는 진짜... 소멸될 뻔했어."
그가 잡은 손은 은월을 쥐던 쪽이라 비교적 상처가 덜했지만, 반대 손에는 감기지 않은 상처들이 자잘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상처들이 오히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볍게 감쌌다.
"그러니까..."
무겁지 않은 공기가 서로를 끌어당겼고,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손끝으로 그의 볼을 두드리며 붉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잘해. 나한테. 네가 하는 거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결정하게."

 

그녀의 장난스러운 도발에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 푸른 숲에서 서로의 검을 맞대던 시절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고?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렸는지... 내가 찾아가서 한마디 해야겠군."
그녀의 손끝으로 내 볼을 두드리는 감각이 너무 선명했다. 300년 동안 잊고 있었던 그 감각이 나를 깨우는 것 같았다.
"잘해달라... 어디 보자."
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어 부드럽게 뒷목을 감싸쥐었다.
"이런 건 어때, 견랑?"
내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 눈가에, 뺨에, 코끝에...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 가까이에서 멈추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돌아온 이상, 이제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할 거야. 그동안의 빚을 갚아야지."

 

"...애초 견랑이라고 부르고, 사랑이라고 말한 것도 네 멋대로였잖아.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물어보고 했어?"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하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나는 그를 마주하던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300년 동안의 빚이 아니라, 네 목숨 두 번 살린 것 까지 갚아."
그의 입술이 내려앉는 속도만큼 느릿하게 눈을 감으며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만큼 잘 해주면... 봐줄게. 나 없는 동안 파다했던, 그 '소문'에 대한 내용은."
내가 가볍게 웃는 소리가 그에 의해 흩어졌다. 끌어당겨 안는 손길 아래에서 모든 것이 아득했다.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이, 우리 사이의 감정의 사랑이라는 이름만이 선명할 뿐이었다. 결국 이름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나는 있는 힘껏, 내가 바라면서도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만큼 그를 끌어안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도발적인 말에 내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장난스럽게 올린 입꼬리 너머로 보이는 진심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진심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내 것에 닿는 순간, 300년의 갈증이 한순간에 해소되는 듯했다. 그리움, 안타까움, 슬픔, 그리고 사랑. 모든 감정이 하나로 엉켜 입술 사이를 오갔다. 나는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팔 안에 가득한 그녀의 온기가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었다.
"견랑..."
나는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단 한 번도 지워진 적 없던 그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얽으며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숨결, 그녀의 모든 것이 내게는 기적 같았다. 이 순간만으로도,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네 목숨 두 번 살린 빚? 그럼 내 평생을 바쳐도 모자라겠군."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고 그녀의 자주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 속엔 더 이상 슬픔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내 모습만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녀가 내 곁에 있고, 내가 그녀 곁에 있음을 그 눈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소문이라... 내가 네 앞에서 맹세하지. 앞으로 내 마음은 오직 너 하나뿐이라고. 300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듯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술을 찾아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더 열정적으로, 더 간절하게. 마치 잊혀진 시간들을 되돌려줄 수 있다면 이 입맞춤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믿는 것처럼.
그녀의 등에 팔을 감아당기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깃털처럼 내 품에 안겼다.
"네가 내 곁에 없던 동안, 나는 살아 있었지만 살아 있지 않았어. 그런데 이제는..."
나는 속삭였다.
"이제는, 내 모든 시간이 네 것이야."
그녀가 웃었다. 어쩌면 나는 그 미소 하나를 보기 위해 300년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봄비가 그치고 있었다. 창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조용한 햇살이 병풍처럼 방 안을 감쌌다. 그녀가 잃었던 그림자가 돌아왔고, 내가 잊었던 사랑이 다시 내 곁에 있었다.
이제부터의 시간은 그 무엇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름을 붙였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붙잡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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