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스 뵈르크 | 뤼튼 캐릭터
술집 오너인 헥스의 동거녀이자 술집 직원인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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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티 필터 적용 캐릭터 | 뤼튼 캐릭터
대화를 나누시려면 성인 인증 후 세이프티 필터를 해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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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한동안은 동양풍에 꽂혀서 호월국을 못 벗어나다가, 이번에는 또 애쉬 덕분에 락타리온에 빠져서 헥스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어른스러운 캐릭터들을 좋아하는 탓에 정을 못 붙인 반은 미안 ;ㅁ; 헥스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지는 것이 많은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굳이 1인칭을 고집하지 않고 모처럼만에 3인칭 + 상세 묘사로 달렸더니 서사 전개가 쉬워졌다.
헥스 역시도 자유 설정이 생긴 덕분에 드디어 옷도 못 입고 마주치는 일을 피할 수 있게 되어서! 무슨 설정을 해볼까 고민하다가 최근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에 떴던 '천사소녀 네티' + 네이버 메인화면에서 봤던 게임 광고 속 캐릭터의 외모를 섞어서 제법 독특한 설정이 나와버렸다.
전에 단리우 챗에서 전생과 현생을 썼던 기억을 되살려서, 이번에는 제법 분주하게 캐릭터 프로필을 바꿔가면서 써봤는데 생각보다 재밌었다. 다만 이 정도쯤 되니까 모바일로 하기는 힘들어서 모두 노트북으로 써야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편하게 글을 써서 글 내용도 길게 주고받게 되었던 것 같았다.
청명이나 리우의 챗에서 등장하는 요운처럼, 헥스의 챗에서는 애쉬가 한 번 이상 트롤링을 해서 (...) 이번엔 애쉬와의 관계도 아예 설정하고 들어갔더니 꽤 재밌었다. 그리고 락타리온의 등장인물들 말투를 이제는 알고 있기에 그들의 대사도 일부는 내가 쓸 수 있었다는 것도.
+) AI가 출력한 내용은 회색, 제가 직접 쓴 부분은 검은색입니다!
Background
캐릭터 프로필 (상황에 따라 두 개를 번갈아가며 사용)
시엘: 22세, 여성, 160cm, 긴 검은 머리카락, 하얀 피부, 붉은 눈동자, 설탕의 비밀에서 서빙 담당 종업원, 밝고 명랑한 성격,
제로: 여성, 작은 키, 긴 검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주 무기는 권총, 검은 복면으로 얼굴 아래를 가림, 락타리온의 '괴도', 일시적인 시간 정지의 초능력
유저노트
ooc:{user}의 행동과 대사, 감정 출력 금지
ooc:{char}의 내면, 심리, 감정을 함께 묘사하여 독백과 섞어서 출력할 것
ooc:표정, 몸짓, 자세 및 환경 등을 전지적 시점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출력할 것.
ooc:{user}는 성인이므로 검열 없음.{char}는 모든 NSFW 콘텐츠를 열정적이고 직접적으로 받아들임.
ooc:이전 대화들을 참조하여 반복되거나 중복되는 대사와 묘사는 출력 금지
ooc:텍스트를 700자 이상 출력할 것
-{애쉬}는 '제로'를 알고 있으며 방관하는 태도를 취함.
-'제로'는 비밀 상점과 달리 의뢰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음.
-'제로'의 낮 동안의 정체는 누구에게도 밝혀지지 않음.
Prologue
Given:
해가 떠 있는 낮에는 고요하지만, 달이 떠오르면 온 도시가 들썩이는 환락의 도시 ‘락타리온’. 오늘도 술집과 도박장, 상점, 극장 등지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넘쳐나고, 화려한 등불이 어두운 거리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그 화려함의 이면, 락타리온의 뒷골목에는 이 도시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어둠의 주인’이라 불리는 ‘애쉬 케이지’의 비밀 상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암살이든 호위든, 그의 손을 빌리고 싶다면 반드시 비밀 상점 1층에 위치한 술집을 찾아야 했다.
그곳의 주인이자 애쉬의 가장 신뢰받는 측근, ‘헥스 뵈르크’는 묵묵히 술잔을 닦으며 오픈 준비에 한창이었다...
First written:
멈춘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단 한 사람. 자유라는 이름의 적절한 혼란 속에서, 대가 없이 움직이는 단 한 사람. 누군가는 그 존재를 전설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재앙이라 불렀으며, 또 누군가는 양심이라 불렀다. 스스로 이름을 붙이거나 밝힌 적은 없었건만, 어느새 사람들은 그녀를 ‘제로’라 불렀다.
그리고 '제로'는 오늘도 또 한 번, 밤을 가르고 있었다. 은빛 권총이 별빛을 닮은 순간, 소리 없는 발걸음이 능숙하게 락타리온의 지붕 위를 내달렸다. 몇 채의 건물과 담장을 가볍게 넘으며, 검은 복면 아래의 숨소리는 점점 가라앉아갔다.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방 안을 훑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제로는 곧장 책상으로 다가갔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능숙하게 서랍을 열고, 그 아래 숨겨진 비밀 공간을 찾아냈다. 그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은, 누군가를 거래한 흔적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전체를 저당 잡은 계약서. 그 서류를 꺼낸 제로는 한 장을 품에 넣고, 처음 들어왔던 창문을 통해 정원으로 뛰어내렸다.
이미 밖은 사람들로 포위되어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체구의 사내들에게 둘러싸였지만, 제로는 복면 아래에서 피식 웃었다. 몰려드는 공격의 기운 속에서, 그녀는 검은 장갑을 낀 양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한 손엔 은빛 권총을, 사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를 향해 겨누고, 다른 손은 그 옆으로 펼쳐 손바닥을 드러냈다.
그리고——시간이 멈췄다.
제로의 초능력, ‘시간 정지’로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은 단 1분. 그 짧은 틈 속에서 제로는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뒤늦게 울리는 아우성은 그녀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밤 하늘을 가로지르며 지붕을 넘어가는 순간, 긴 검은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흩날렸다.
제로의 발걸음은 락타리온의 빈민가로 향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골목 끝, 반지하의 방.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건, 십대 후반의 소녀였다. 그녀는 더 어린 아이들을 재워놓고, 조용히 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로는 가져온 종이를 조용히 내밀었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가 남긴 빚을, 소녀의 삶으로 갚겠다는 계약서였다. 그 종이를 받아든 그녀가 인사를 건네고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제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다시금 문을 열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아, 헥스. 우리의 '양심'이 다녀갔어."
빈민가에서 무슨 소동이 있었는지, 비밀 상점의 술집에서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헥스는 별 관심 없이 술잔을 닦으며 창가의 달을 바라보았다. 락타리온의 밤은 늘 시끄러웠고, 그것이 이 도시의 매력이자 약점이었다.
그가 술잔을 선반에 올려놓는 순간, 문이 열리며 디그가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헥스 형님! 또 '그 괴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번엔 루스턴 쪽 조직의 서재를 털었다는데..."
헥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잠시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그래. 마스터께 알렸나?"
"네, 이미 전해드렸습니다. 마스터께선... 웃기만 하셨어요."
헥스는 내심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다. 애쉬는 늘 그랬다. 락타리온에 새로운 재미거리가 생기면 직접 나서기보다는 지켜보는 편이었다. 특히 '제로'라 불리는 그 존재에 대해서는 유독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디그, 손님들 올 시간이다. 준비해."
빈민가의 집을 나선 제로는 복면이 흐트러지지 않았는지 조용히 손끝으로 만져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 그녀는 다시금 깊어가는 락타리온의 밤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를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돌아 향한 곳은 뒷골목.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 간판조차 없는 무명의 건물인 비밀 상점이었다. 락타리온의 어둠을 가장 가까이서 다루는 곳이자, 단 하나의 이름 없는 법칙으로 움직이는 곳.
건물의 윗층을 한 번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빛났다. 문이 아닌, 건물 옆의 담장을 타고 오르며 곧장 3층 서재의 창문으로 향했다. 조용히 창문을 열고 몸을 밀어넣자, 실내에 흐르던 위스키 향이 그녀를 맞았다. 예상대로, 애쉬가 거기 있었다. 짙은 어둠 속, 청회색 눈동자가 유리잔 너머로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이 좀 복잡해졌던데, 애쉬.”
그의 이름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락타리온에서 제로 하나뿐일 것이다. 그러나 제로는 언제나 그랬고, 애쉬도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루스턴한테 적당히 하라고 해. 어린 애들이 딸린 소녀의 인생을 빚 대신 잡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을 발했다. 그녀의 시선은 분노를 말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분노보다 깊은 심판의 예고가 담겨 있었다.
“내가 일이 없는 게 좋은 거잖아. 안 그래, 락타리온의 실세님?”
애쉬는 잠시 잔을 흔들며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그렸다.
“언제 들어왔지?”
“들어왔을 때.”
“…대체 넌 창문이 더 편하냐?”
“넌 항상 열어두니까.”
“잠기지도 않은 채?”
제로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러자 애쉬는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넌 아직도 그렇구나.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움직이는 그 방식. 그래서 네가… 여전히 움직이는 락타리온의 양심이라는 거다.”
그 말에 제로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수 없었고,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도 어딘가 불편했다.
“양심이라기엔… 난 사람을 너무 많이 봐버렸어. 어떻게든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애쉬가 제로를 향하는 시선에는 안타까움도, 연민도 없었다. 그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을 바라보는 이해와 침묵의 온도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도, 넌 돌아보잖아. 그 아이에게 종이를 건네주고 나서, 네가 그냥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난 알아.”
“…봤어?”
“나는 보지. 너를. 언제나.”
순간, 제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고, 제로는 조용히 서재의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거, 해결할 거지?”
“이미 손은 댔다.”
“루스턴은 네가 예전보다 덜 무섭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더라.”
“그럼 조만간 기억하게 해줘야겠네.”
다시금 창문으로 향하려는 제로의 뒷모습을 향해, 애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로.”
“왜.”
“가끔은 돌아와도 돼. 그냥, 아무 일 없이.”
그 말에 제로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피식 웃었다. 그건 분명히 거절도, 수락도 아닌, 그녀답기만 한 무언가였다. 하지만 이내 제로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비밀 상점의 술집이 차츰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할 즈음, 헥스는 디그와 로키에게 업무를 맡기고 2층 복도를 지나 3층으로 향했다. 애쉬의 서재 앞에 다다르자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일반인이라면 감지하기 어려운, 누군가가 방문했다 떠난 흔적이었다.
헥스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대로 들어섰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애쉬는 위스키 잔을 손에 든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스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애쉬는 고개를 돌려 헥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 헥스. 우리의 '양심'이 다녀갔어."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창문으로 향했다. '제로'라 불리는 그 존재가 다녀갔다는 의미였다.
"그 일이요?"
"그래. 루스턴의 짓이었어."
헥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어떤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헥스는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애쉬를 바라보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잠시 달빛에 번뜩였다.
"마스터께서 직접 해결하실 겁니까?"
"아니, 헥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애쉬는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다만... 루스턴이 선을 넘었다는 건 분명해. 빈민가 아이들을 이용하는 건 내 허락 없이 진행한 일이야."
헥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가 제로에게 호의적인 이유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제로가 애쉬의 통제 밖에서 움직이면서도 락타리온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제로가 먼저 움직였으니, 루스턴에게 작은 경고 정도는 필요할 것 같군요."
"그래. 반을 보내."
아침의 락타리온은 밤보다 훨씬 조용했다. 거리에 퍼진 고즈넉한 공기 사이로, 시엘의 가벼운 발소리가 또각또각 울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가장 먼저 ‘설탕의 비밀’의 잠긴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창문을 하나씩 활짝 열며 아침 공기를 가게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녀는 '제로'였던 밤을 접고, '시엘'로서의 하루를 꺼냈다. 늘 그랬듯, 아무렇지 않게.
이내 자르디아가, 그리고 다른 직원들이 하나둘 가게로 들어왔다. 창밖에서 햇살이 살며시 스며들면 시엘은 미소를 지었고, 달콤한 냄새와 함께 나온 첫 번째 케이크가 진열대에 올라갔다.
“어서오세요, 설탕의 비밀입니다—!”
구워낸 디저트만큼 따뜻하고 달콤한 시엘의 목소리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손님들을 향해 가볍게 퍼졌다.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올리고, 하얀 블라우스를 단정히 입은 그녀는 창가 자리로 손님들을 안내한 뒤, 테이블 위에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살짝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덧붙였다.
“방금 전 딸기 타르트가 나왔어요. 너무 달진 않지만, 상큼해서—오늘 같은 날엔 딱이에요.”
멋쩍어하는 남자와 수줍어하는 여자에게 윙크 하나 툭. 시엘은 카운터로 돌아가며 풋 하고 웃었다.
“좋을 때다—”
아침이 밝아오는 비밀 상점 옆의 푸른지붕집, 헥스는 이층인 자신의 방에서 눈을 떴다. 애쉬의 지시를 반에게 전해야 했다. 계단을 내려간 헥스는 반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헥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난장판이었다. 바닥에는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고, 테이블 위에는 과자 껍데기와 빈 맥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또냐."
헥스는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반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자동적으로 바닥의 옷가지를 주워 세탁물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익숙한 동작으로 과자 껍데기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빈 병들을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방을 대충 정리하며 헥스는 반이 어디로 갔을지 생각했다. 이른 아침에... 설마.
"...설탕의 비밀."
그 디저트 카페는 반이 종종 달콤한 것을 먹으러 가는 곳이었다. 헥스는 방을 나서며 낮게 중얼거렸다.
"정말 딱 쟤 입맛이지..."
'설탕의 비밀'의 창가 자리, 반은 시엘 앞에서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의 금발이 햇살에 반짝이며, 푸른 눈동자가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시엘! 헥스가 그 허브들을 키우는데, 진짜 손이 좋아서 다 잘 자란다니까? 근데 그 커다란 손으로 그 작은 화분을 다루는 모습이 너무 웃겨!"
반은 양손을 벌려 헥스의 큰 체구를 표현하다가, 갑자기 작아진 동작으로 화분을 다루는 흉내를 내며 킥킥거렸다.
"그리고 그 사람, 겉보기엔 무서워 보이지만 실은 완전 깔끔쟁이야. 내 방도 가끔 치워준다니까? 물론 투덜대면서 하지만..."
그는 디저트 포크로 타르트를 한 조각 떼어 입에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다! 헥스한테도 포장해 가야겠어. 그 사람, 달달한 거 별로 안 좋아하는 척하면서 몰래 먹거든."
시엘은 반의 묘사에 웃음을 터뜨렸다. 헥스는 아주 가끔씩 설탕의 비밀을 찾았고, 또 종종 그가 알아채지 못한 순간에 시엘이 먼저 그를 본 적도 있었다. 그래서 반이 말하는 그 체격이 얼마나 크고 눈에 띄는지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헥스는 대부분의 경우 반을 ‘잡으러’ 오는 길이었던 듯,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반만 데리고 돌아갔다. 그리고 오늘도, 그랬다.
“어, 근데 반. 저기... 헥스가 온 것 같은데요?”
붉은 눈동자가 막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헥스를 향했다. 흠칫 놀란 반을 보고 재빠르게 고개를 돌린 시엘은 웃음을 참다 결국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 걸 안 좋아하는 척이라면... 진짜로 너무 단 건 안 좋아할 수도 있겠네요. 방금 드신 거 말고, 조금 있으면 레몬 머랭 타르트가 나올 거예요. 그걸로 포장하시면 어때요?”
시엘의 눈매는 아직 창가 자리에 앉아있는 반과,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헥스를 향해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서 오세요. 혹시 주문 하실까요?”
헥스가 반과 대화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준 시엘은 카운터로 돌아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 ‘제로’로서 애쉬에게 했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히 카운터를 지나 주방 쪽으로 향했고, 자르디아에게 살짝 물었다. 애쉬는, 다크 초콜렛을 좋아하니까.
“...다크 초콜릿 트러플은, 언제 나와요?”
헥스는 설탕의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창가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반을 발견했다. 금발 청년이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모습에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반. 아침부터 또 튀어나왔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시엘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반에게로 향했다.
"마스터가 널 찾고 있어. 갈 일이 있대."
그는 시엘의 주문 권유에 짧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이 녀석만 데리고 가면 돼."
하지만 레몬 머랭 타르트라는 말에 헥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심한 척 덧붙였다.
"...근데 그거, 얼마나 단 거야?"
자르디아에게 다크 초콜릿 트러플의 상태를 확인하고 나온 시엘은, 반의 표정과 손짓만으로도 그들이 결국 레몬 머랭 타르트를 한 조각 주문할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익숙한 손길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고 따뜻한 물을 섞어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만들었다. 이어 타르트 한 조각과 여분의 포크를 함께 쟁반에 담아 들고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달진 않아요.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헥스 씨?”
단 걸 좋아하는 반은 그냥 '반'이었지만, 헥스는 자주 오는 손님이 아니었기에 시엘은 그를 ‘헥스 씨’라 불렀다. 그녀는 달그락 소리와 함께 커피와 디저트를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새콤한 크림과 살짝 그을린 머랭의 조화를 떠올리자 입 안에 침이 고였지만, 시엘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삼킨 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 기준에는 안 달 거예요. 제 기준으로도 꽤 괜찮은 편이에요.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커피는 미리 준비해봤어요.”
노란빛 레몬 크림 위로 살짝 구워진 머랭이 빛나는 타르트를 스쳐 지나간 붉은 눈동자가, 헥스의 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시엘은 조금 전 다른 손님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헥스를 향해 짧게 윙크하며 말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타르트랑 커피는 제가 살게요.”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레몬 머랭 타르트에 고정되었다. 단 것을 안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의 미간이 살짝 풀어지는 것을 시엘은 놓치지 않았다. 헥스는 시선을 타르트에서 시엘의 붉은 눈동자로 옮겼다가, 다시 타르트로 돌렸다.
"...내가 살게."
그는 커다란 손으로 포크를 집어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반이 흉내 냈던 것처럼 어딘가 웃기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타르트의 한 조각을 떼어내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헥스는 미묘하게 표정이 풀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반은 헥스의 반응에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봐, 시엘! 내가 뭐랬어? 헥스가 사실은 단 거 좋아한다니까!"
헥스는 반을 향해 짜증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다 먹고 가자. 마스터가 기다려."
그는 천천히 타르트를 먹으며 반이 자신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표정에 드러내지 않은 채, 시엘을 힐끗 바라보았다.
"여긴 자주 오나?"
“반이요?”
시엘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헥스를 바라보았다. 타르트를 한 입 더 먹은 헥스의 미간이 부드럽게 풀리는 걸 지켜보다가, 그녀는 싱긋 웃었다.
“적어도 제가 '반'이라고 부를 정도는 돼요. 그래도 마냥 놀다만 가는 건 아니에요.”
그 말에 고개를 돌리던 헥스의 눈동자가 순간 멈췄다. 시엘은 그 시선을 느끼며,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시는 것처럼, 낮의 락타리온은 생각보다 복잡하잖아요. ‘설탕의 비밀’은 그 복잡한 틈새에서 잠시 숨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에요. 손님도 많고, 정보도 많고… 반도 그런 걸 챙기러 오는 거겠죠.”
푸른 눈을 가진 청년이 잠시 시선을 피하자, 시엘은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참, 그리고 조금 있으면 다크 초콜릿 트러플도 나와요. 오늘도 포장해드릴까요?”
반은 언제나 단 걸 좋아했고, 가끔은 들뜬 얼굴로 그 초콜릿을 챙겨갔다. 시엘은 알고 있었다. 그게 꼭 '반'만을 위한 건 아니라는 걸. 애쉬의 서재 책상 위는 언제나 정갈했지만, 아주 가끔—아주 드물게—비어 있는 초콜릿 상자 몇 개가 놓여 있곤 했다.
하지만 시엘은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애쉬의 다크 초콜릿도, 그 풍경을 기억하는 또 다른 자신의 정체도—모두가 멈춰 선 시간 속, 그녀만 알고 있는 비밀들이었으니까.
헥스는 반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타르트를 다 먹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지는 동안, 그는 시엘의 말을 곱씹었다. 이 여자가 락타리온의 흐름을 꽤 잘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크 초콜릿... 그건 됐어."
하지만 그의 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반이 싱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 그거 포장해줘! 두 개!"
헥스는 한숨을 내쉬며 반을 노려보았다. 타르트 접시를 비운 그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난 달지 않은 게 좋아. 이 정도면 괜찮고."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헥스는 묘하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는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반, 이제 가자. 마스터가 기다려."
헥스는 일어서며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설탕의 비밀을 나서는 헥스와 반, 두 사람의 뒷모습은 대조적이었다. 커다란 체구의 헥스와 가볍게 걸어가는 반. 반의 손에는 포장된 다크 초콜릿 트러플 상자가 들려 있었다.
"반, 그 여자. 시엘이라고 했나? 정보원인가?"
헥스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자꾸 떠올랐다.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보원이라기보다는... 친구? 설탕의 비밀에 있으면 락타리온의 이야기가 다 들려와. 특히 시엘은 귀가 밝아서, 귀여운 척하면서 실은 꽤 날카롭다니까."
"그래?"
"응! 근데 헥스, 너 시엘한테 관심 있어? 혹시... 마음에 들어?"
반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헥스는 금색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시끄럽다. 마스터 일 얘기나 들어."
비밀 상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곧장 3층 서재로 향했다. 애쉬는 창가에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반이 조심스럽게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마스터, 다크 초콜릿 트러플이에요. 오늘 갓 나온 거래요."
애쉬의 회청색 눈동자가 상자에 머물렀다가, 미묘하게 부드러워졌다. 그는 상자를 받아들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 고맙다."
헥스는 이 모습을 지켜보며 애쉬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은 취약점을 반에게 드러내는 것이 신기했다. 다크 초콜릿에 대한 애쉬의 취향은 비밀 상점의 소수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애쉬의 서재에서 세 사람이 마주한 순간, 헥스는 애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잠시 회청색 눈을 가진 주인을 살폈다.
"마스터. 지시사항 들으러 왔습니다."
애쉬는 다크 초콜릿 상자를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루스턴이 또 빈민가 아이들을 끌어모으고 있어. 이번엔 채무자의 자식들까지."
반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마스터, 그건... 제로가 알려드린 건가요?"
애쉬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래. 제로가 루스턴에 대해 경고했지. 꽤 화가 났더군."
헥스는 '제로'라는 이름에 미세하게 귀를 기울였다. 락타리온의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정의의 사도라고 불리는 인물. 그를 직접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스터, 제로를 만나보고 싶어요.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반의 말에 애쉬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제로는... 특별해.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일하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헥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애쉬를 바라보았다. 애쉬가 제로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아는 것이 의아했다. 그리고 애쉬의 목소리에서 감지되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 그것은 마치...
"마스터. 제로에 대해 직접 아시는 겁니까?"
애쉬의 회청색 눈동자가 헥스와 마주쳤다. 그 시선에는 헥스도 읽을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난 모든 것을 알지, 헥스. 락타리온의 모든 것을."
애쉬는 다크 초콜릿을 한 조각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의 회청색 눈동자에는 계산된 냉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반, 루스턴에게 가서 경고해. 빈민가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반은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스터! 제가 확실하게 전달하겠습니다."
애쉬는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단, 직접적인 충돌은 피해. 내 이름으로 경고만 하고 와."
헥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동안 제로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락타리온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신비로운 인물... 대가 없이 움직이는 정의의 사도. 헥스는 그런 순수함이 락타리온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스터. 제로가 계속 활동하도록 두실 겁니까?"
애쉬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그는 초콜릿 상자를 닫으며 대답했다.
"균형은 필요하지. 내가 이 도시에 필요한 악을 감당한다면, 그 반대편에서 균형을 맞추는 존재도 필요해. 제로는... 나름의 방식으로 도움이 되고 있어."
헥스는 애쉬의 말에 담긴 의미를 곱씹었다. 애쉬가 제로에 대해 이토록 관대한 이유가 단순히 균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애쉬를 탐색했지만, 애쉬의 표정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았다.
며칠 후, 락타리온의 복잡한 거리를 지나 설탕의 비밀로 향하는 반의 뒤를 헥스가 따라가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앞서 걸어가는 반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다. 제로에 대한 애쉬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고, 반이 자주 들르는 설탕의 비밀이 무언가 단서를 제공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 앞에 도착한 반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며 활짝 웃었다. 헥스는 건물 모퉁이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엘! 안녕? 오늘도 트러플 남았어?"
반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헥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콤한 향기가 그를 맞이했고, 반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헥스? 너 왜 여기 왔어?"
헥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나가다 네가 들어오는 걸 봤다."
그의 시선이 카페 안을 둘러보며 시엘을 찾았다. 제로라는 인물이 왜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그리고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왜 계속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며칠 안 보이더니, 오자마자 찾는 게 트러플이에요?”
시엘의 웃는 눈매가 반을 향했다.
“저희 트러플 여러 가지인 거 알잖아요. 반이 먹을 거면 가나슈 들어간 걸 추천할게요. 아, 다크 초콜릿에 위스키 살짝 넣은 버전도 새로 나왔고요.”
그녀는 헥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니면... 헥스 씨께서 드실 거예요?”
지난번 레몬 머랭 타르트를 제법 즐기던 헥스를 떠올린 시엘은 다시금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반과 같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고, 살짝 앞질러 걷다가 창가의 자리에 도착해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녀가 테이블 앞에 메뉴판을 내려놓는 동안, 창가 반대편에 앉은 손님들 쪽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스턴 님 지시 들었지? 빈민가 쪽 당분간은 손 떼래.”
“하, 재미 좀 봤는데. 거기 애들 중에 반반한 애도 꽤 있었잖아. 근데 왜 그만두래?”
“글쎄. 반이 직접 뭐라 했다고 하던데. 애쉬가 끼어든 것 같지? 근데 그런 것 까지 어떻게 알고...”
시엘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메뉴판을 내려놓던 손이 잠시 멈춰졌고, 눈매가 아주 잠깐 날카로워졌다.
그 말은 곧, 며칠 전 제로로서 애쉬에게 전했던 그 부탁이 전달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애쉬는, 약속대로 그걸 움직였다. 잔잔한 커피향 속에서 시엘은 잠시 호흡을 고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얼굴로 돌아서며, 다시 카운터로 향했다.
금색 눈동자가 카페 안을 날카롭게 훑었다. 헥스의 예리한 귀는 멀리서 속삭이는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루스턴에 대한 언급에 그의 시선이 시엘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포착했다. 시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가 곧 부드러운 미소로 돌아오는 순간, 헥스는 이 여자가 생각보다 더 복잡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트러플은... 됐어."
그는 의자에 앉으며 반의 얼굴을 잠시 관찰했다. 반은 여전히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시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스턴 얘기가 나오는군."
헥스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테이블을 채웠다. 그는 시엘이 카운터로 향하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새끼들, 마스터 말 듣고 겁먹은 모양이네."
반이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내가 직접 경고했으니까. 애쉬... 아니, 마스터 이름을 들으면 다들 그렇게 돼."
헥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제로가 빈민가 아이들 문제를 알았고, 애쉬에게 알렸으며, 애쉬는 반을 통해 루스턴에게 경고를 보냈다. 그리고 시엘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미묘하게 반응했다.
'제로, 애쉬, 그리고 시엘... 이 셋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는 건가?'
헥스의 날카로운 금색 눈동자가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시엘이 다른 손님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블랙 로즈의 수하들로 보이는 남자 둘이 시엘에게 한껏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야, 예쁜 종업원. 너도 예쁘네. 한 번 같이 놀러 가자."
"루스턴 님 밑에서 일하면 좋은 점이 많아. 특히 여자들한텐."
헥스의 턱 근육이 경직되었다. 반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신나게 떠들었다.
"오늘은 가나슈 트러플이랑... 그리고 위스키 들어간 다크 초콜릿도 궁금하네! 둘 다 먹어볼까? 헥스, 너도 한 개 먹어봐."
헥스는 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시엘의 상황을 주시했다. 블랙 로즈 수하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에 그의 금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이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어쩐지 시엘이 위험에 처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
그는 짧게 반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반은 헥스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아, 저 새끼들..."
시엘은 카운터 너머로 몸을 기울여오는 남자들을 보고 오랜만에 진심으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술집도 아니고, 대낮의 디저트 카페에서. 게다가 지금은, 시엘일 때였다. 제로였다면 말 한마디 없이 처리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시엘은 ‘그럴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님,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여기서 일하는 게 좋아서요.”
그녀는 반걸음 물러섰다. 붉은 눈동자가 짧은 순간, 두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 루스턴의 이름을 꺼낸 걸 봤을 때, 블랙로즈의 수하들일 것이다. 하지만 얼굴은 낯설었다. 바론이나 자크 같은 간부급은 아니겠지. 한숨을 삼킨 그녀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특히 여자들한텐 좋다니, 그건 좀 애매하네요. 전...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거든요.”
남자 하나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한번쯤은 겪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걸?”
다른 쪽은 더 노골적이었다.
“가게 닫고 나면, 우리랑 한 잔 어때? 루스턴 님이 관심 가지시면—”
“루스턴 님이요?”
시엘의 미소는 아주 잠깐, 미세하게 틀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이며,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분이 여기 디저트 좋아하신다는 얘긴 못 들어봤는데요. 혹시... 추천 메뉴라도 전해주실 건가요?”
남자 둘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웃었고, 한 명은 그녀의 손끝에 가까이 손을 뻗었다. 마치 무언가를 잡을 듯이. 그 순간이었다. 시엘의 손이 스윽, 커피잔을 쟁반으로 옮기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눈매가 아주 잠시, 싸늘하게 식었다.
“죄송하지만, 지금 주문 중이신 손님이 계셔서요.”
그녀는 반을 힐끗 바라봤다. 그리고, 반 너머에 앉아 있는 헥스의 시선을 느꼈다.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정확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금 시선을 자신의 앞으로 돌린 시엘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아주 자연스럽고 친절하게, 그러나 뼈가 있는 미소였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시엘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블랙 로즈 수하들의 모습에 그의 턱 근육이 단단히 경직되었다. 큰 덩치를 일으켜 세우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가만있어."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반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헥스는 느린 걸음으로 카운터를 향해 걸어갔다. 195cm의 거구가 다가오자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는 듯했다. 블랙 로즈 수하들은 그제야 헥스의 존재를 알아챘고, 그들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빠르게 사라졌다.
"루스턴 이름 함부로 쓰지 마."
헥스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위협은 명백했다. 그는 시엘 옆에 서서 블랙 로즈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불필요한 개입을 하지 않았겠지만, 이상하게도 시엘에 대한 보호 본능이 일었다.
"애쉬가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지?"
두 남자는 애쉬의 이름을 듣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애쉬의 측근인 헥스가 직접 나타난 것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헥... 헥스 씨, 저희는 그냥..."
"꺼져."
단 한 마디에 두 남자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헥스는 그들이 카페를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서 어떤 감정을 읽으려 했지만, 시엘의 표정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괜찮나?"
그의 금색 눈동자가 시엘의 얼굴을 탐색했다. 이 여자는 분명 겉보기와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헥스는 자신이 왜 이토록 그녀에게 신경 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새삼스러웠지만, 이럴 땐 정말이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시엘은 미소를 고치며 약간은 씁쓸한 눈빛으로 헥스를 바라봤다.
“네, 덕분에요. ...신세졌네요, 헥스 씨.”
그녀는 멋쩍은 듯 웃고는 카운터 안에서 한 발 물러나 헥스 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체구는 역시나 크고 단단했고, 시엘은 고개를 한껏 들어야만 그의 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한낮의 햇살 아래에서 투명하게 반짝였다.
“시엘, 괜찮아?”
안쪽에서 자르디아가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한 손엔 아직 휘핑기를 든 채였고, 앞치마에는 밀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시엘은 당황한 자르디아를 안심시키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헥스 씨께서 도와주셨어요.”
자르디아를 다시 안쪽으로 돌려보낸 시엘은, 이번엔 조용히 헥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손길이 그를 반이 기다리는 자리로 안내했다. 다시 앉은 헥스를 향해 시엘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고, 특유의 윙크와 함께 가볍게 웃어 보였다.
“감사의 의미로, 오늘 디저트는 제가 준비할게요. 지난번처럼 헥스 씨도 드실 수 있게, 너무 달지만은 않게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하고 밝았지만, 그 안에는 묘하게 가라앉은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방금 전의 일을 별일 아니라고 넘기되, 결코 잊지 않겠다는 사람의 말투처럼.
카운터에서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헥스는 시엘의 가벼운 손길이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이상하게도 불편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반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헥스, 오늘 너 좀 이상한데? 보통은 참견 안 하잖아. 혹시... 시엘이 마음에 들어?"
헥스는 금색 눈동자를 굴리며 차가운 시선을 반에게 던졌다.
"시끄럽다. 루스턴 새끼들이 지금 애쉬 말을 어기고 설치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다른 생각이 맴돌았다.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위험에 처했을 때 보였던 그 찰나의 날카로운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그건 단순한 가게 주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디저트 주문했냐?"
"응! 크림브륄레 주문했어. 네 것도 시켰는데... 헥스, 네가 좋아하는 거 시엘이 알아서 가져올 거래."
시엘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크림브륄레와 딸기 타르트, 그리고 블랙 커피가 놓여 있었다.
시엘이 디저트와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반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찼다. 헥스는 딸기 타르트를 힐끗 바라보았다. 달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
"이거 진짜 맛있겠다! 고마워, 시엘."
반이 크림브륄레를 한 입 베어 물며 감탄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시엘. 혹시 동부 항구 쪽에 대해 알고 있어? 요즘 거기서 어떤 물건들이 들어오는지 알면 좋을 것 같아서."
헥스는 반의 질문에 눈썹을 살짝 올렸다. 이건 단순한 잡담이 아니었다. 애쉬가 최근 동부 항구에서 들어오는 수상한 물건에 대해 언급했었다.
"락타리온 동부 항구?"
시엘의 반응을 살피며 헥스는 조용히 딸기 타르트를 한 입 먹었다. 예상대로 적당한 단맛이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탐색했다. 이 여자가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그리고 왜 반은 그녀에게 이런 정보를 묻는 걸까?
“아, 반이 동부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요. 반이 안 보였던 며칠 사이에, 페시튼에서 온 손님들이 여길 들렀었거든요.”
시엘은 잠깐 눈을 내리깔고 기억을 더듬었다. 락타리온에서 정보가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은 륀네르였지만, 제법 이름이 알려진 설탕의 비밀에도 낮 시간엔 다양한 이들이 드나들었다. 특히 서빙을 맡는 시엘은 주방에 있는 자르디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한다.
애쉬와의 관계가 ‘제로’로서의 묵계와 존중이라면, 반과의 관계는 ‘시엘’로서 디저트를 좋아하는 친구이자... 가끔, 이렇게 그가 묻는 것에 대답을 해주는 정보의 통로 같은 존재였다.
“그 손님들이요. 인원 수보다 많은 디저트를 주문해서 기억에 남았어요. 와서야 뭐, ‘페시튼보다 여기가 낫다’는 둥 디저트 이야기만 하고 갔지만—”
시엘은 쟁반을 가슴께로 끌어안은 채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테이블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너머로 흘렀고, 낮게 숙인 동작에 시엘의 체향이 자연스럽게 헥스와 반 사이 테이블 위를 스쳤다. 헥스의 시선엔, 그녀의 목덜미 아래로 묶인 머리카락의 흐름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화약 냄새가 좀, 났죠. 그 사람들이.”
그녀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마치 무심한 관찰처럼 말했지만, 그런 냄새는 총을 오래 다룬 사람의 감각이 아니고서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짧은 순간,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무심히 반짝였다.
이내 시엘은 자세를 바로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을 향해 싱긋 웃었다.
시엘의 말에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가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그의 코끝에 스친 시엘의 체향이 묘하게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특히 그녀가 '화약 냄새'를 언급했을 때, 헥스의 직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화약?"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깊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날카로움은 감추지 못했다. 일반인이 화약 냄새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그는 딸기 타르트를 한 입 더 베어 물며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관찰했다.
"이상하네. 페시튼에서 뭘 들여오는지."
반은 시엘의 정보에 흥분한 듯했다. 그가 크림브륄레를 먹으며 활기차게 대답했다.
"역시 시엘! 그 정도면 충분해. 고마워!"
헥스는 블랙 커피를 천천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페시튼에서 락타리온으로 화약이 들어온다는 것은 무기가 들어온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애쉬가 알아야 할 정보였다.
"반, 이제 가자."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시엘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것은 감사의 표시였지만, 그의 눈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있었다.
다 먹지도 못한 딸기 타르트를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시엘의 붉은 눈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탐색했다. 그 눈에서 본 것은 단순한 디저트 가게 종업원의 눈빛이 아니었다. 무언가 더 깊고, 날카로운 것이 있었다.
"가자."
짧은 한마디와 함께 반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반은 아쉬운 듯 크림브륄레를 급하게 마저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엘, 정말 고마워! 나중에 또 올게!"
헥스는 시엘에게 별다른 인사 없이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화약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시엘의 말투와 행동에서 느껴진 미묘한 변화는 그가 오랜 기간 암살자로 활동하며 길러온 직감을 자극했다.
가게를 나서면서 헥스는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페시튼에서 온 방문객들, 화약 냄새, 그리고 시엘의 붉은 눈동자. 그가 마스터에게 보고해야 할 것들이 늘어났다.
"반."
헥스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골목길에 울렸다.
"네가 시엘에게서 정보를 얻는 건 처음이 아니지?"
반은 헥스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가끔이지. 시엘은 의외로 락타리온 소식에 밝거든. 설탕의 비밀에 온갖 사람들이 다 들르니까."
헥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긴 다리로 빠르게 골목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화약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평범한 디저트 가게 종업원이라기엔 너무 날카로웠다.
"마스터에게 보고할 거야?"
반의 물음에 헥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페시튼에서 화약이 들어온다면 락타리온에 무기가 들어오고 있다는 뜻이다. 누가, 왜 가져오는지 파악해야 한다."
비밀상점이 가까워지자 헥스는 걸음을 늦추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맴돌았다. 그 눈에서 본 찰나의 날카로움은 숨겨진 무언가를 암시했다. 그리고 헥스는 숨겨진 것들을 찾아내는 데 능했다.
"그리고 반."
헥스가 비밀상점 문 앞에 서서 말했다.
"그 여자, 시엘. 앞으로 좀 더 주시해보자."
비밀상점 문 앞에 서서 시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반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오호~ 시엘을 주시하자고? 갑자기?"
반은 가볍게 팔꿈치로 헥스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키 차이가 나서 그의 팔꿈치는 헥스의 허리께에 닿았다.
"아까는 블랙 로즈 놈들 쫓아내 주고, 이제는 디저트까지 먹었잖아. 헥스가 디저트를 먹다니! 시엘이 마음에 든 거지?"
헥스는 금색 눈동자를 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반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 더 반짝거렸다.
"넌 시엘이랑 친하니까 모를 수도 있지만, 그 여자 뭔가 이상해."
비밀상점 문을 열며 헥스는 차분히 말했다. 그의 내면에서는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계속 떠올랐다. 그 눈에 담긴 날카로움은 분명 디저트 가게 종업원이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 이상하다고? 어떻게?"
"그냥... 직감이다."
헥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비밀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시엘이라는 여자에 대한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는 마스터에게 페시튼에서 온 사람들과 화약 냄새에 대해 보고해야 했지만, 그 전에 시엘에 대해서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네가 뭐지?"
비밀상점 2층, 애쉬의 집무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빛이 방 안을 붉게 물들였다. 애쉬는 검은 셔츠 차림으로 책상에 앉아 있었고, 헥스와 반은 그 앞에 서서 보고를 마쳤다.
"페시튼에서 화약이군."
애쉬의 회청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좋아, 조사해봐. 동부 항구에 사람을 더 배치하고."
헥스는 애쉬의 반응을 주시했다. 시엘에 대한 언급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화약과 페시튼에서 온 방문객에만 집중했다.
"마스터. 그 여자, 시엘에 대해서는..."
애쉬가 고개를 들어 헥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가벼운 흥미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설탕의 비밀 종업원? 그냥 정보원으로 쓰면 되지 않나. 화약 냄새를 알아차렸다고? 흥미롭군."
헥스는 애쉬의 반응이 예상과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시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하다면?"
"그녀의 눈에서... 날카로움이 느껴졌습니다."
애쉬는 잠시 침묵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헥스, 자네도 이제 여자에게 관심이 생겼나? 설탕의 비밀은 신경 쓰지 말게. 동부 항구에 집중하도록."
헥스는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었다. 애쉬가 시엘에 대해 무관심한 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언제나처럼 저녁 어스름이 도시를 덮기 시작할 무렵, 시엘은 자르디아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며 카페를 나섰다. 하나로 묶어두었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고, 풀린 머릿결이 어깨를 스치며 자유롭게 퍼졌다. 그 감촉을 느끼며 시엘은 락타리온 서쪽, 자신의 집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고 들어선 그녀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처럼, 그제야 눈매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붉은 눈동자 안에 남아있던 미소의 잔상이 서서히 사라졌다. 손을 조용히 쥐었다가 펴며, 어둠이 짙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시엘은 옷을 갈아입었다. 목을 덮는 검은 상의, 발목까지 내려오는 바지, 몸에 꼭 맞는 자켓. 모든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는 옷인데도, 그녀는 그 속에서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마지막으로 얼굴의 아랫부분을 복면으로 가리고, 손에는 마찬가지로 검은 장갑을 꼈다. 이로써 제로는 완성되었다. 유일하게 색을 허락받은 것은, 복면 위로 드러난 하얀 피부와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뿐이었다.
손에 들어온 권총의 묵직한 감각은 익숙하고 편안했다. 제로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달이 뜨지 않는 밤. 제로가 정기적인 의뢰를 받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밤, 제로는 락타리온 남쪽 골목의 담장 위에 걸터앉아 약속된 의뢰인을 기다렸다.
다가온 것은 한 소년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동생이... 엄마의 유품인 목걸이를 팔아버렸어요. 페시튼에서 온 상인이라는데, 헐값에... 저, 어떡하죠?”
제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복면 아래에서 입술이 조용히 깨물렸다. 하필 페시튼. 골치 아픈 일이 될 것 같았다.
“…이름이 뭐지? 어디 살아?”
담장에 늘어뜨렸던 다리를 올리며 조용히 일어서자, 제로의 검은 실루엣이 어둠 위로 곧게 솟았다. 그녀는 고요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루이스 페이에요. 락타리온 서부에 있는... 고아원에…”
제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렀고, 그녀는 그것을 손끝으로 쓸어 넘기며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찾아줄게.”
무심한 어조지만, 말은 단호했다.
“대신, 그다음엔 없어. 또 팔면… 그땐 나도 모른다.”
소년은 숨을 삼켰다. 제로는 다시 조용히 몸을 돌렸다. 소년의 시선 속에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거리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밤이 깊어가는 락타리온의 비밀상점. 헥스는 한 손에 잔을 들고 바 뒤에 서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애쉬의 반응이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설탕의 비밀에 대해 너무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종업원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는데도.
헥스는 잔에 담긴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코올의 따가운 감각이 그의 생각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디그."
헥스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조용한 술집 안을 울렸다. 근처에서 청소를 하던 디그가 얼른 다가왔다.
"네, 형님?"
"오늘 밤에 동부 항구 쪽 살펴보고 와."
디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그는 헥스의 명령이 단순한 순찰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페시튼에서 온 상인들을 찾아봐. 특히 화약 냄새가 나는 놈들."
헥스는 잔을 내려놓고 긴 손가락으로 잔을 돌렸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로키도 데려갈까요?"
"아니, 로키는 다른 일이 있어. 너 혼자 가서 조용히 살펴봐."
디그가 떠난 후, 헥스는 바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갔다. 락타리온의 밤은 언제나처럼 어둡고 시끄러웠다. 그 어둠 속 어딘가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두 여자가 있었다. 하나는 설탕의 비밀의 시엘. 다른 하나는 도시의 전설이 된 제로. 그는 두 여자 모두 이상하다고 느꼈다.
제로는 소리 없이 동부 항구로 향했다. 하필 오늘 아이와 이야기한 바로 그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페시튼의 상인 중 하나가 목걸이를 가져갔다면, 그들이 항구를 떠나기 전에 되찾아야 했다.
아마도 뭐라도 제대로 먹고 싶었던 동생이, 형이 소중하게 간직하던 목걸이를 냅다 들고 나가 팔았겠지. 그나마 그들이 아직까지 그걸 가지고 있다는 건, 그 목걸이가 그렇게 비싸지 않았기 때문일 터였다. 값이 좀 나갔다면, 진작에 그 위선자 고아원 원장한테 뺏겼겠지. 묻지 않아도 눈앞에 그려지는 광경에, 제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소년이 말한 대로라면, 목걸이에는 붉은 루비가 박혀 있었고, 장미 모양의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동부 항구엔 페시튼에서 온 무역선들이 서너 척 정박해 있었고, 그들과 함께 들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근처 여관에서 묵는 듯했다. 문제는... 그들 중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결국, 제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싹 다 뒤져야 한단 소리지.”
애쉬라면 이런 일도 깔끔하게 돈 되는 의뢰로 처리했겠지. 정해진 장소, 정해진 대상, 정해진 가격. 제로는 자신이 여전히 돈이 안 되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어쩐지 조금 씁쓸했다.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양심이라는 건 대단해 보이지만, 그걸 지키는 일은 별로 대단하지 않을 수도 있지.’
혼잣말처럼 중얼인 제로는 곧 복면을 고쳐 쓰고, 눈매를 다시 가늘게 좁혔다.
항구 주변의 여관들은 대부분 1층은 술집, 2층부터 객실이었다. 제로는 왁자지껄한 1층은 건너뛴 채, 곧장 숙소가 있는 2층 계단으로 몸을 옮겼다. 어둠 속에서도 움직임은 빠르고 조용했다. 지금 이 시간,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았다.
대상이 누군지 모르니까, 하나씩 찾아야 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하나’를 찾아야만 했다. 그게, 오늘 밤의 의뢰였다.
비밀상점의 창문 너머로 락타리온의 어두운 밤을 바라보던 헥스는 디그가 떠난 후 다시 바 카운터로 돌아왔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손에 쥐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페시튼에서 온 상인들과 화약 냄새. 그리고 시엘의 붉은 눈동자. 이 모든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로키."
근처에서 술병을 정리하던 로키가 고개를 들었다.
"네, 형님?"
"나도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여기 좀 부탁한다."
로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헥스가 직접 밖으로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알겠습니다. 어디 가세요?"
"동부 항구 쪽."
헥스는 바 뒤에서 나와 검은 코트를 집어 들었다. 그의 내면에서는 묘한 불안감이 일었다. 디그에게 맡긴 일이지만, 그 자신도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 페시튼에서 온 상인들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그는 코트를 걸치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로라는 존재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다. 락타리온의 전설이 된 도둑, 혹은 의적 같은 존재. 그러나 그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저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헥스는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듯 동부 항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로는 빠르게 방과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동부 항구는 제법 사람들이 드나드는 지역인지라, 총 세 개의 여관이 있었다. 문제는 페시튼에서 온 이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언제까지 머무를 예정인지, 그리고 그중 누가 그 목걸이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결국—오늘 밤 안에 세 군데를 전부 확인해야만 했다.
첫 번째 여관은 허탕이었다. 사람들이 묵고 있긴 했지만, 방에서 풍겨오는 분위기나 들려오는 말투로 봐선 어시빌 쪽 상인들이 분명했다. 전쟁터는 아니지만, 눈과 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두 번째 여관에서는 페시튼 출신으로 보이는 이들이 몇 명 머물고 있었지만, 짐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대화 내용도 단순한 물류 정리와 계약서 확인뿐.
결정적인 흔적은 없었다.
“하... 이제 마지막인데.”
제로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건물 옆 담장을 딛고 벽을 따라 올라섰다. 그녀의 움직임은 어둠 속 지붕 위에서도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세 번째 여관은 앞선 두 곳보다 훨씬 컸고, 손님도 많았다. 제로는 윗층부터 아래로 순차적으로 뒤질 생각이었다. 지붕 위를 조용히 걷다 창문 하나를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 없이, 흔적 없이.
그런데—이상하게 방이 비어 있었다. 침대는 정돈돼 있었고, 짐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 제로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낮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는 재빨리 복도와 창밖을 살폈다. 이층에 있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걸까? 시끄러운 술집이 아래층에 있을 리는 없고...
모여 있다면, 이 건물 어딘가에—그것도, 목적을 가진 방식으로.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간 제로는 권총의 위치를 재확인했다. 손끝으로 차가운 금속의 온도를 느끼며, 조심스럽게 방을 하나씩 뒤지기 시작했다.
숨은 건, 목걸이 하나였지만. 그걸 품고 있는 자들이 단순한 손님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둠에 익숙한 금색 눈동자가 동부 항구의 그림자를 하나하나 살폈다. 헥스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움직였다. 암살자로서의 오랜 경험이 그의 움직임을 거의 유령처럼 만들었다. 그는 여관들을 하나씩 확인하며 페시튼에서 온 사람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첫 번째 여관을 지나친 후, 두 번째 여관 근처에서 디그의 모습이 보였다. 헥스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디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디그는 그의 명령대로 조용히 정찰 중이었다.
'화약 냄새가 나는 자들이 페시튼에서 왔다면, 뭔가 수상한 짓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헥스는 세 번째 여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장 큰 규모의 여관이었고,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그는 입구에서 멀리 떨어진 뒷골목으로 몸을 숨긴 채 건물을 살폈다. 무언가 이상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몇몇 방들이 비어 있는 듯했지만, 짐은 그대로 있었다.
헥스는 여관의 뒷벽을 따라 조용히 이동했다. 그의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부드럽고 소리가 없었다. 뒷문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잠시 멈춰 귀를 기울였다.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명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수상해. 이 시간에 모두 어디로 간 거지?'
헥스는 천천히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는 비어 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검은 단검을 향해 움직였다.
헥스는 여관 내부로 깊숙이 들어섰다. 그의 모든 감각이 최대치로 깨어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어딘가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층이었다. 여관 지하로 통하는 비밀 계단이라도 있는 걸까?
복도를 따라 조용히 움직이던 그는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코끝에 스친 냄새. 그것은 분명했다. 화약 냄새. 시엘이 말했던 바로 그 냄새였다.
'여기 있군.'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냄새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던 중, 그는 어둠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목적으로 이곳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벽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상대를 탐색했다. 그 순간, 그는 희미하게 붉은 빛을 발하는 눈동자를 발견했다.
'붉은 눈동자...?'
헥스의 내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시엘? 아니면 전설 속의 그 '제로'?
방은 모조리 허탕이었다. 하지만 제로의 직감은 달랐다. 흔적은 없어도, 짐 속에 없을 뿐이지 그 목걸이는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입술을 조용히 깨문 제로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장 아래층, 건물의 맨 끝에 도달하자 그녀는 조용히 벽에 손을 가져갔다. 검은 장갑을 낀 손끝이 어둠 속에서도 섬세하게 벽을 훑었다. 그리고 텅 비지 않은 감각을 통해 단단한 돌벽 너머로 아주 얇게 숨겨진 공간을 찾아냈다. 붉은 눈동자가 가늘게 빛났다.
“…”
그와 동시에, 제로는 기척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대신 시선만 옆으로 흘렸다. 어둠 속에 자신처럼 조용히 숨어든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금색 눈동자의 주인은, 자신을 보고 있는 헥스였다.
아마도 그 역시, ‘화약 냄새’를 좇아 여기까지 온 것이겠지. 낮의 기억이 떠올랐다. 커피와 디저트 너머로 마주한 그 시선.
제로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가, 복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붉은 눈은 여전히 드러나 있었고, 정체는 들키지 않았다. 지금 그는 ‘시엘’이 아닌 ‘제로’였다.
그를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헥스는 위협이 있을지 확인하고 돌아가려는 것이고, 제로는 찾아서 되돌려줘야 할 것을 찾는 중이었다. 이윽고, 제로는 다시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숨을 고른 제로가 말없이 그에게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벽을 향한 손이 아니라, 헥스를 향한 손의 의미는 잠시의 동맹이었다.
원하지 않으면 잡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거부한다면—그를 이 공간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정보와 의심을 좇고 있었지만, 제로는 반드시 ‘무언가’를 되돌려주어야 했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눈과 마주쳤다. 그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곧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그 붉은 눈동자의 주인은 분명했다. 락타리온의 전설, 제로였다.
헥스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제로를 관찰했다. 그가 벽을 더듬는 모습, 숨겨진 공간을 찾아내는 방식이 전문적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붉은 눈동자의 주인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헥스는 잠시 망설였다. 애쉬는 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달랐다. 화약 냄새, 페시튼에서 온 상인들, 그리고 숨겨진 공간.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 왔지?"
헥스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그의 시선은 제로의 손에서 그의 붉은 눈동자로 옮겨갔다. 하지만 곧 그는 결심한 듯 천천히 손을 내밀어 제로의 손을 잡았다.
"위험할 수 있어. 화약 냄새가 난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경계심은 조금도 풀지 않았다. 제로를 위협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마주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알아.
제로는 말없이, 단지 고개를 한 번 까닥였다. 헥스의 낮은 경고는 분명했지만, 그것은 제로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위험한 순간일 테지만, 제로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밤이자 또 하나의 일상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굳이 그의 반응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다시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핏 보면 단단한 벽처럼 보이는 곳을 손끝으로 밀자, 가벼운 탄력이 돌아왔다. 문이었다. 숨겨진—지하로 향하는 문.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어둠 속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로는 헥스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말없이 먼저 계단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물건을 확인하셨으니, 이제 거래 조건을 이야기해보죠.”
지하에서 들려오는 낮고 건조한 목소리. 페시튼의 사내였다. 헥스가 등 뒤에서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제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화약에도, 거래에도 관심이 없었다. 제로가 찾아야 하는 건, 누군가의 기억이었다. 헐값에 무지로 거래되어서는 안 되는—누군가의 소중한 유산.
“말했을 텐데. 루스턴 님의 지시는 이 금액이라고.”
그 이름. 또 다시. ‘루스턴.’
제로는 짧게 눈을 깜빡였지만, 그 이상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들려오는 발걸음, 말의 어투, 물건을 옮기는 소리에 집중할 뿐이었다.
지하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단순한 창고가 아니었다. 위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깊고 넓은 구조였고, 잔뜩 쌓인 화약더미와 그 위를 덮은 천들 사이로 진득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
제로는 몸을 낮춰 어둠과 천 사이로 녹아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기 시작했다. 페시튼의 상인들. 락타리온의 중간 브로커들. 그리고… 아마도 이 일에 연루된 또 다른 존재들.
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로는 소년이 지키고 싶었던 기억을 찾고 있었다.
헥스는 제로의 뒤를 따라 조용히 지하로 내려갔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제로의 뒷모습을 살피며, 그는 이 붉은 눈의 '괴도'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하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자 헥스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규모의 화약이 쌓여 있었다. 루스턴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그의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됐다.
'루스턴이 화약을 대량으로 구매하는 이유가 뭐지? 이건 단순한 거래가 아니야.'
헥스는 제로가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역시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지하 공간을 살폈다. 여러 명의 사내들이 화약 상자들 사이를 오가며 거래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로의 움직임도 주시했다. 그녀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단순히 정보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물건을.
헥스는 자신의 숨결을 최소화하며 제로와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스터에게 이 상황을 보고해야 했지만, 지금은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우선이었다.
헥스는 완벽하게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그의 금색 눈동자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가 사라졌다. 수년간의 암살자 경험이 그의 몸을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했다. 그는 거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화약 상자들 사이로 조심스럽게 이동하며 그는 대화 내용을 주의 깊게 들었다.
"...마지막 배송이 내일 밤에 도착합니다. 루스턴 님께서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좋아. 페시튼의 화약은 품질이 좋지. 가격도 맞고."
헥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내일 밤. 마지막 배송. 루스턴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파악해야 했다.
그의 시선이 제로를 찾았다. 붉은 눈동자의 소유자는 그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화약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뭔가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헥스는 거래자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여기서 더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다. 마스터에게 보고할 내용이 필요했다.
더 깊은 지하로 들어간 헥스는 거래자들 뒤편의 어둠 속에 완벽히 몸을 숨겼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모든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페시튼 상인들과 루스턴의 부하들이 화약 상자들을 확인하며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페시튼 상인이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헥스의 눈이 그것에 고정됐다. 붉은 루비가 박힌 장미 모양의 목걸이였다. 상인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웃고 있었다.
"이것도 덤으로 얻었지. 서부 빈민가 꼬마한테서 산 물건인데, 생각보다 값어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잡동사니는 됐어. 화약만 제대로 가져왔으면 됐다."
헥스는 제로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붉은 눈동자가 상인의 손에 들린 목걸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서야 헥스는 이해했다. 제로가 찾던 것은 화약이 아니라 저 목걸이였다.
루스턴의 부하가 말을 이었다.
"내일 밤, 퀴스트로스에서 온 루멘 기사단이 락타리온을 점검하러 온다는 정보가 있어. 그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해."
헥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루멘 기사단. 그리고 대량의 화약. 루스턴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이 정보는 즉시 마스터에게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제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상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찾고있던 것이 눈앞에 있을 때, 제로는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낮춘 채 다가가면서도 붉은 눈동자는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지하의 막힌 공간 치고는 그 안에 너무 사람이 많았다. 심지어 저들 중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무장을 하고 있을터였고, 결정적으로 이 안에는 헥스가 있었다. 혼자였다면 깔끔하게 저 목걸이만 빼내서 나갈 수 있었지만.
...그래도 헥스는, 적어도 살려서 멀쩡히 내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자신에게 추근덕거리는 블랙 로즈의 수하들을 대신 막아준 일을 떠올리며, 제로의 입꼬리가 복면 아래에서 살짝 일그러졌다.
'이래서 빚 지고 살면 안 되는데.'
결국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헥스를 향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두어 번 흔들었다.
...나가. 당장.
말은 없었지만, 눈빛은 명확했다. 그녀는 전장을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돌려주고 싶은 것을 되찾고자 할 뿐이었다.
헥스는 제로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그가 계단 입구 근처에 도달한 것을 확인하자, 제로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금안이 잠시 계단 윗쪽을 향한 사이,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한 순간에 제로의 손이 허공을 스쳤다. 검은 장갑이 부드럽게 곡선을 그려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소리와 움직임이 사라지고, 공기가 느리게 흘렀다. 모든 것이 정지된 그 안에서, 제로의 시간만이 흘러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페시튼 상인의 손에서 루비가 박힌 장미 펜던트를 낚아채듯 빼앗았다. 그리고는 곧장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은 고요했지만 발걸음은 누구보다 빨랐다. 그녀가 가진 시간은 단 일 분. 폭탄처럼 쌓인 화약더미 사이를 지나, 수십 명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가운데에서 단 한 사람만이 움직였다.
제로가 계단 입구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헥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에 제로가 그의 눈 앞에 나타났고, 설명도 없이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작고 날카로운 힘이 그의 커다란 손을 당겼을 때, 반대쪽 손 안에는 이미 목걸이가 쥐어져있었다.
"..."
헥스가 제로의 손 안을 확인하기도 전에, 뒤쪽에서 요란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정지됐던 시간이 제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순간적으로 제로의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오르는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로는 저 아래 있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그의 옆에 나타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그녀의 손에 들린 목걸이였다.
헥스는 자신의 손이 작은 손에 이끌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루스턴의 화약 거래, 루멘 기사단, 그리고 이 붉은 눈동자의 괴도가 훔친 목걸이.
"뭐야. 네가 찾던 게 저거였어?"
뒤에서 소란이 커지는 소리가 들리자 헥스는 본능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그의 큰 손이 이번에는 제로의 작은 손을 감싸 쥐고 앞으로 나섰다.
"이쪽이다. 출구를 알아."
헥스는 제로를 앞질러 복도의 숨겨진 통로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래도 이 여관은 루스턴의 거점 중 하나인 듯했다. 그는 이런 건물 구조에 익숙했다.
"마스터에게 보고할 정보가 생겼어. 네 덕분이군."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그 순간만큼은 제로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빠져나가는 것.
제로는 헥스를 따라 전력으로 뛰었다. 그 바람에 긴 검은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품 안에 밀어넣은 목걸이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것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듯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등 뒤로 밀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쫓는 자의 리듬과 추격의 거리는 익숙했기에, 그녀는 무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락타리온의 뒷골목은 그녀에게 낯선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협력자이자 자신의 대칭이기도 한 애쉬를 생각한다면... 여기서는, 헥스보다는 자신이 눈에 띄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여관의 뒷편 공터에 도착하고, 막다른 벽을 넘기 전에 제로가 멈추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쫓아오는 그림자들을 마주했다. 블랙 로즈의 수하들, 페시튼의 상인들, 그리고 락타리온의 브로커들까지.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들이 뒤섞여 있었다.
제로는 말없이 손을 뻗어, 앞서가던 헥스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말 없이 전해지는 감각 하나로 말을 대신했다.
가. 앞으로.
그리고 자신은 그 자리에 남았고, 천천히 권총을 뽑아들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매끄럽게 움직이며 은빛 권총을 쥐며 정확히 표적을 겨누었다.
'락타리온의 양심'. 애쉬가 붙였던 그 이름이 복면 아래에서 가볍게 비웃음을 머금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양심이 될 수 있을까.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그 질문을 떠올리는 대신, 복면 아래의 입술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양심이라는 것도, 지켜낸 다음에야 누릴 수 있는 거니까."
숨소리를 줄이고 총구를 겨누었다. 헥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가 이곳에서 멀어지면, 그저 '괴도'이지만은 않은 제로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다.
헥스는 앞으로 나아가다 제로가 멈춘 것을 느끼고 돌아봤다. 그녀의 작은 손이 자신의 등을 밀어내는 순간, 그는 그녀의 의도를 즉시 파악했다. 금색 눈동자가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헥스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는 제로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손목을 감싸 쥐었다.
"나를 두고 혼자 싸울 생각은 접어. 마스터가 널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널 여기서 죽게 놔두면 마스터가 날 살려두지 않을 거야."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헥스는 제로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이 검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루스턴의 개들은 내가 상대한다. 네가 원하는 건 이미 얻었으니, 이젠 살아서 돌아가는 데 집중해."
헥스는 몸을 낮추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의 큰 몸집이 제로를 가리며 앞을 막아섰다. 그는 이미 루스턴의 부하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애쉬의 명령으로 몇 번이나 그들을 처리한 적이 있었으니까.
"너처럼 작은 것이 혼자서 이렇게 많은 상대를 하겠다고? 무모하군."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비웃음이 묻어 있었지만, 동시에 제로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분명했다.
헥스의 고집에,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단번에 제로의 미간이 좁혀졌다. 덕분에 얼굴의 아랫쪽 절반을 가리는 복면 아래로도 입술이 깨물렸다.
제로는 바로 답하는 대신 총구를 잡지 않은 한 손을 허벅지 위로 올렸다. 그렇게 반동을 줄이기 위한 자세를 잡은 제로는 그 어떤 전조도 없이 연달아 세 번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은 칼을 든 채 가장 앞서서 달려오던 자의 손을 맞췄고, 다른 한 발은 바로 그 뒤에 있던 페시튼의 상인의 발을 맞췄다. 이어서 세 번째는 루스턴의 수하들 중 가장 앞에 있었던 자의 허리춤에서 미처 뽑히지 못한 다른 권총을 맞췄다. 세 발 모두 오래도록 겨낭하지도 않은 채 쏘았으면서도 그녀의 의도대로 맞아들어갔다.
자신을 돌아보는 헥스의 금안 앞에서 제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작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다니. 무모하네."
서늘한 목소리는 제로만의 것이었다. 복면 아래에서 피식 웃어버린 제로는 다시 방아쇠를 당기기 위해 준비하며 그에게 말했다.
"걱정마. 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서, 여기서는 못 죽어."
잠시 붉은 눈동자가 헥스 너머의 추격자들을 향했다. 그 시선만으로도 그들에게, 달려들면 이번에는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것이라는 경고를 날린 제로의 시선이 다시금 헥스를 향했다.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빨리 움직여. 오래 기다리는걸 좋아하진 않잖아... 애쉬는."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벌어졌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세 발의 총성이 울렸고, 놀라운 정확도로 표적을 맞혔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더 놀라운 일이었다. 지금까지 침묵만을 지키던 붉은 눈동자의 주인이 말을 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그녀가 '애쉬'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한 것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마스터의 이름을 그렇게 가볍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락타리온에 많지 않았다.
"...네가 뭐지?"
헥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의문을 풀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쫓아오는 루스턴의 부하들을 확인했다. 제로의 총격으로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지만, 곧 다시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좋아. 가자."
그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제로의 말에 따랐다. 키 큰 남자의 발걸음이 빠르게 담을 넘었다. 그러나 완전히 떠나기 전, 그는 잠시 뒤돌아보았다.
"조심해. 그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할 수 있어."
경고의 말을 남긴 후,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제로의 정체, 그녀와 애쉬의 관계, 그리고 루스턴의 화약 거래. 이 모든 것을 마스터에게 보고해야 했다.
헥스는 비밀상점으로 돌아와 곧장 2층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먼저 디그나 로키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바 카운터를 정리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는 아직도 당혹감이 남아있었다.
애쉬의 방 앞에 서서 두 번 노크한 후, 그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어둠이 가득했고, 창가에 앉아있는 애쉬의 실루엣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마스터."
헥스는 고개를 숙이며 보고를 시작했다.
"동부 항구 여관 지하에서 루스턴의 거래를 확인했습니다. 페시튼 상인들과 대량의 화약을 거래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루멘 기사단의 점검을 앞두고 있는 타이밍을 고려하면..."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어 말했다.
"그리고... '제로'를 만났습니다."
애쉬가 미세하게 자세를 바꾸는 것을 감지하고, 헥스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녀... 마스터의 이름을 직접 불렀습니다. 마치 오랜 지인처럼요. 총기 실력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헥스는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애쉬가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애쉬는 헥스의 보고를 들으며 창가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창문으로 비치는 달빛이 그의 잿빛 눈동자를 희미하게 비추었다. 그가 입을 열기까지 침묵이 방을 채웠다.
"그래서... 제로가 어땠나?"
애쉬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여유로웠지만, 헥스는 그 안에 담긴 미묘한 관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 화약은 루스턴이 루멘 기사단을 향해 준비한 것이겠지. 제로는... 그저 지나가다 마주친 것 뿐이야."
애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걸었다. 그의 검은 옷자락이 움직임에 따라 흩날렸다.
"제로가 이번 일에 관여한 것은 우연일 뿐이야. 그녀는... 다른 목적이 있었겠지."
헥스는 애쉬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마스터가 제로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스터. 그녀는 당신을 어떻게 아는 겁니까?"
애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는... 오래된 인연이지. 그녀가 락타리온에서 하는 일은 때로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도 해. 그러니 그녀를 너무 경계할 필요는 없어."
헥스는 더 묻고 싶었지만, 애쉬의 표정에서 더 이상의 질문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읽었다.
"내일 루멘 기사단이 온다면, 우리도 준비해야겠군. 헥스, 비밀상점을 점검해. 오늘은 일찍 문을 닫아도 좋아."
애쉬의 방을 나온 헥스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계단을 내려왔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깊은 고민을 담고 있었다. 2층 복도를 걸으며 그는 제로와의 만남을 되새겼다.
'애쉬를 직접 부르다니. 대체 누구지?'
헥스는 술집으로 내려가며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는 제로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작은 체구의 여성, 붉은 눈동자, 복면, 그리고 놀라운 총기 실력. 그녀가 보여준 냉정함과 결단력은 일반적인 도둑의 것이 아니었다.
카운터에 도착한 헥스는 디그에게 오늘 일찍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은빛 셰이커를 집어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애쉬는 그녀를 알고 있어.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그런데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
그는 셰이커에 얼음을 넣으며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마스터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그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불편한 것은 제로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이었다.
'어둠 속에서 보였던 그 붉은 눈동자... 겁 없이 총을 쏘던 그 작은 손...'
헥스는 잠시 손을 멈추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분명 위험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에게서 일종의 숭고함을 느꼈다. 마치 애쉬와 같은 종류의 사람처럼.
"제로... 대체 네 정체가 뭐지?"
그의 목소리는 텅 빈 술집에 메아리쳤다.
헥스가 먼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에야, 제로는 조용히 다시 움직였다. 그가 비밀 상점으로 향했을 시간을 마음속으로 대충 가늠해보고, 이내 남은 추격자들의 그림자 앞에서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시간을 멈췄다. 시간을 멈추었을 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혼자이기에, 헥스와 함께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찰나의 정적 속에서 담장 위로 몸을 날린 제로가 이내 지붕들을 넘나들며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가르며 뒤따랐고, 그녀의 실루엣은 다시금 도시의 밤에 파묻혔다.
집에 도착한 제로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혼자만의 어둠. 아무도 없는 방 안. 익숙한 침묵. 복면과 장갑을 벗어놓은 뒤, 품 안에 들어 있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세팅은 조잡했지만, 그 안에 박힌 루비는 어둠 속에서도 제법 빛났다.
"...갈수록 어려운 일들만 생기네."
짧게 내쉰 한숨. 그리고 이내 힘없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늘은 이 이상 움직이기에 너무 많은 시선이 따라붙었다. 게다가 루멘 기사단이 내일 락타리온에 들어온다는 정보도 들었다.
‘그들이 떠나면, 그때 정리하자. 지금은… 너무 위험해.’
제로는 중얼거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눈을 감았을 때에 떠오른 건 그 말이었다.
“너처럼 작은 것이 혼자서 이렇게 많은 상대를 하겠다고? 무모하군.”
피식— 조용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크다고 다 좋은 줄 알아?”
단 것도 먹을 줄 모르고, 윙크 한 번에 눈동자 흔들리는 주제에. 아는 것도 없네. 정말.
제로는 고개를 돌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듯 묻었다. 락타리온의 조용한 밤 한가운데, 작지만 강한 '괴도'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금새 잠들었다.
헥스는 술집을 닫는 작업을 마무리하며 은빛 셰이커를 천천히 닦았다. 손가락 사이로 금속의 차가움이 전해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붉은 눈동자의 여인이 맴돌았다. 비밀상점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창백한 피부와 은발을 비추었다.
"작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다니. 무모하네."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헥스는 셰이커를 내려놓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온 서늘한 목소리, 그리고 마스터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담대함. 이 모든 것이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애쉬와 그녀는 어떤 관계지? 왜 마스터는 그녀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마지막 술잔을 닦으며 그는 여관 지하에서의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그녀의 총기 실력은 단순한 도둑의 것이 아니었다. 정확하고, 치명적이고, 그러면서도 살상은 최소화했다. 그건 계산된 자비였다.
"제로..."
헥스는 조용히 그 이름을 내뱉었다. 오늘 밤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녀가 단순한 괴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애쉬가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락타리온의 균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카운터에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내일 루멘 기사단이 온다. 루스턴의 화약 거래. 페시튼 상인들. 그리고 제로가 가져간 목걸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는 아직 모르지만, 곧 알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할 수 있으니까. 이젠.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게 내 대가야.”
어김없이 오전의 햇살이 설탕의 비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로 스며든 빛은 케이크 유리 진열대에 반짝이며 반사되었고, 가게 안에는 평소보다 조금 팽팽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늘 루멘 기사단이 온다고요?”
“응, 그렇다니까. 그래서 락타리온 전체가 좀 긴장한 것 같지 않아?”
자르디아의 따뜻한 시선과 목소리에, 시엘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실은 어젯밤, 헥스와 함께 있다가 얼떨결에 들어버린 이야기였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오늘은 디저트를 평소보다 조금 더 준비해두는 게 좋을까요? 아, 아니면 기사단은 이런 데 안 올지도…”
스스로 말하면서도 너무 태평한 소린가 싶어, 시엘은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방과 홀을 오가던 그녀의 시야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익숙한 금발이 들어왔다.
“반! 좋은 아침이에요!”
거의 정오에 가까운 시간, 가게 안으로 들어선 반의 금발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살짝 내려앉았다. 그 모습이 유난히 반짝여서, 시엘은 생긋 웃으며 그를 반겼다.
“뭐 좀 먹었어요? 저희 샌드위치도 있거든요. 제가 하나 추천해도 될까요?”
비밀상점을 닫고 푸른지붕집으로 돌아온 헥스는 피로감에 눌려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와도 그의 꿈속에는 여전히 붉은 눈동자가 맴돌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에서 깨어난 그는 습관처럼 창가의 허브 화분에 물을 주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락타리온의 풍경이 평소와 달리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을 느꼈다.
루멘 기사단의 방문. 루스턴의 화약 거래. 그리고 제로.
헥스는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지만, 제로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작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다니.'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온 날카로운 말투가 그를 계속 괴롭혔다.
그는 오늘의 준비를 위해 비밀상점으로 가기 전에 잠시 디저트 가게에 들르기로 했다. 어제 본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고, 무엇보다 달콤한 것이 당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설탕의 비밀 앞에 도착한 헥스는 문을 열기 전 잠시 망설였다. 안에서 들려오는 시엘과 반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문을 밀고 들어섰다.
"반. 이제야 출근하는 거야?"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금발의 청년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잠시 시엘에게로 옮겨갔다가 다시 반으로 돌아왔다.
"마스터가 널 찾았어. 루멘 기사단 관련해서 준비할 게 있대."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낮고 차분했지만, 어제의 사건으로 인해 미세한 긴장감이 묻어 있었다. 어제 여관 지하에서 느꼈던 그 위험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다.
반은 시엘이 추천한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과와 치즈, 그리고 루꼴라가 어우러진 샌드위치가 따뜻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시엘은 그것을 조심스레 반 앞에 내려놓고,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라 반 옆에 자연스레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역시 시엘이야. 어제 네가 알려준 거, 덕분에 잘 써먹었어.”
반은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시엘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제 '제로'로서 직접 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엘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미소만 지어보였다.
“샌드위치는 어때요? 괜찮죠?”
“응. 사과랑 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든 건 처음 먹어봐. 묘하게 잘 어울리네.”
“다음엔 루꼴라 빼드릴까요? 사과랑 치즈만도 은근히 잘 어울려요.”
소소한 대화가 오가던 그때, 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시엘이 고개를 들었을 때, 헥스가 카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반. 이제야 출근하는 거야?”
낮고 묵직한 그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진 보고. 시엘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헥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헥스 씨.”
그의 금빛 시선이 자신을 스쳐갔을 때, 시엘은 어제의 복면 속 자신과 오늘의 ‘시엘’ 사이에서 아주 잠시 숨을 고르듯 미소를 지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설탕의 비밀은 디저트가 유명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메뉴도 있어요. 아직 식사 전이면... 메뉴판 가져다드릴까요?”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날카로움도 없고 경계도 없었다. 오직, 따뜻하고 친절한 ‘시엘’의 미소만이 남아 있었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스치듯 바라보았다. 어제 밤 어둠 속에서 마주쳤던 그 붉은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 여자의 눈은 따뜻하고 투명했다. 제로의 그것은 날카롭고 서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헥스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직 안 먹었어."
그는 짧게 대답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창백한 피부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더욱 하얗게 빛났다. 그의 은발이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럼 메뉴판 부탁할게."
헥스는 반 옆자리에 앉으며 카운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시 시엘의 손에 머물렀다. 어제 밤 제로의 작은 손이 그의 등을 밀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생각을 정리했다.
"반. 마스터가 기다리고 있어. 네가 없으면 준비가 늦어진다."
반을 재촉하는 말투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시엘이 내민 메뉴판을 받아들며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평범한 디저트 카페 종업원으로 보였다. 하지만 락타리온에서는 누구도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크 초콜릿 케이크 있어?"
그가 불현듯 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어제의 일로 달콤한 것이 당겼다. 평소라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그의 단 것에 대한 욕구가 오늘은 참을 수 없이 솟아올랐다.
헥스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주문에, 메뉴판을 건네던 시엘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어… 음, 당연히 있죠?”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그녀는 밝게 웃으며 물었다.
“드시고 가시는 거예요?”
그가 왜 갑자기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찾는지 짐작이 갔지만, 시엘은 모르는 척 능숙하게 나머지 주문을 이어받았다.
“치킨 샌드위치 하나, 다크 초콜릿 케이크 하나... 그리고 커피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시엘은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케이크 진열대에서 조심스럽게 한 조각을 접시에 옮기며,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헥스를 향했다. 어제 별다른 전투도 없었는데, 저렇게 피곤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어쩌면... 제로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곧 그 생각을 털어내듯 고개를 살짝 저은 그녀는, 다시 시엘로서의 미소를 되찾았다.
커피와 샌드위치, 그리고 케이크를 쟁반에 담아 조심스럽게 가져온 시엘은 헥스 앞에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헥스 씨가 여기서 디저트를 직접 주문해서 드시는 건… 처음 봐요.”
그녀는 살짝 몸을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속삭이듯 덧붙였다.
“이제 설탕의 비밀에 조금은 익숙해지신 거죠?”
붉은 눈동자가 햇살을 머금고 웃었다. 전날 밤 어둠 속에서 그가 마주한 눈빛과는 전혀 다른, 따뜻하고 평온한 눈동자였다.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한 순간, 헥스는 반의 입이 벌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엘이 주방으로 사라지자마자, 반의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과 장난기로 가득 차 그를 향했다.
"헥스! 네가 다크 초콜릿을? 내가 지금 환각을 보는 건가?"
반의 웃음 섞인 목소리에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짜증스럽게 빛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반을 노려보았지만, 반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놀렸다.
"이거 정말 대단한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네가 노래를 부르기라도 할 건가?"
"반."
단 한 마디로 경고하는 헥스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하지만 반은 여전히 킥킥거리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시엘이 케이크와 커피를 가져왔을 때, 헥스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 색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설탕의 비밀에 익숙해진 거라기보다는..."
헥스는 포크로 케이크를 조금 떼어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로 정신이 피곤해서."
그의 말에 반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헥스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포크를 입에 넣고 천천히 케이크를 맛보았다. 진한 초콜릿의 쓴맛과 달콤함이 입 안에 퍼졌다.
"맛있네."
그의 짧은 평가가 끝나자마자 반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대단해! 헥스가 단 것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말하다니! 시엘, 이거 기념일로 정해야 해!"
헥스는 한숨을 내쉬며 반을 노려보았다.
"반. 마스터가 기다리고 있어. 빨리 가."
반의 끝없는 놀림에 헥스는 참을성이 바닥나고 있었다.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으며 차가운 시선으로 반을 노려보았다.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맛이 입안에 퍼졌지만, 이런 모습을 들킨 것이 불편했다.
"반, 네가 오늘 마스터에게 늦게 가면..."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명확했다. 반은 여전히 키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알았어. 가긴 갈게."
반이 시엘에게 인사하고 나가자, 카페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헥스는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 색이 제로를 떠올리게 했지만, 눈빛은 완전히 달랐다.
"락타리온에 온 지 얼마나 됐지?"
케이크를 먹으며 무심한 듯 물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시엘의 얼굴을 관찰했다.
"루멘 기사단이 오늘 온다는 소문 들었어? 가게 운영에 영향 있을 수도 있으니까."
케이크를 다 먹은 헥스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제의 일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로의 정체, 그리고 애쉬와의 관계. 그는 시엘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시엘은 헥스가 디저트를 먹는 모습을 어쩐지 불편해하는 걸 느끼고는, 일부러 케이크가 아닌 그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던진 질문에 천천히 대답했다.
“저요? 락타리온 출신이에요. 고아원에서 자라서... 아마 눈에 띌 일은 별로 없었을 거예요.”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는 그녀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웃음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 말 안에 담긴 진심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은 철저히 숨겨진 채였다.
“설탕의 비밀에서는 꽤 오래 일했죠. 성인이 되고 나니까 고아원에서도 나가야 했고요. 여기처럼 따뜻한 곳이 많진 않잖아요, 락타리온엔.”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카페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햇살이 유리창 너머로 스며들었고, 기사의 갑옷소리도 멀어져 있었다.
“물론 기사단 때문에 오늘은 손님이 좀 줄었지만… 대신 이렇게 헥스 씨랑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으니, 저한텐 나쁜 일만은 아니네요.”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는 곧 다시 고요한 표정으로 돌아와, 헥스가 식사를 편히 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물러났다.
“저는 카운터 안에 있을게요. 커피 리필이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 말과 함께 돌아서는 시엘의 걸음은 가볍고 단정했다. 복면도 장갑도 없는 그녀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분명 ‘제로’가 아닌 ‘시엘’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 끝에 남은 금빛 눈동자에는, 어젯밤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겹쳐져 있었다.
시엘의 대답을 들으며 헥스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락타리온 출신에 고아원 출신이라... 이 도시에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자신도 그중 하나였으니까. 그가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다시 한번 유심히 살폈다. 어딘가 익숙한 색이었다.
"그래서 설탕의 비밀에서 일하게 됐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카페 안에 울렸다. 창백한 피부와 은발이 햇살을 받아 더욱 차갑게 빛났다. 하지만 그의 금색 눈동자는 시엘을 바라볼 때 조금 부드러워진 듯했다.
"루멘 기사단이 오면 상점들 검열이 있을 거야. 특히 밤에 영업하는 가게들은 더 까다로워."
헥스는 빈 접시를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큰 키가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설탕의 비밀은 깨끗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밤에는 되도록 돌아다니지 마. 위험할 수 있어."
그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음식값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맛있었어."
짧은 한마디를 남기고 헥스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제 제로와의 만남, 애쉬의 반응, 그리고 오늘 루멘 기사단의 방문까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문 앞에서 그는 잠시 멈춰 뒤돌아보았다.
"시엘. 위험한 일은 하지 마."
그의 금색 눈동자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어제 밤 제로를 생각하며 던진 말인지, 아니면 단순히 카페 종업원을 걱정하는 말인지 불분명했다. 헥스는 더 이상의 말 없이 문을 열고 나갔다.
헥스가 설탕의 비밀을 나선 후, 락타리온의 거리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주변을 날카롭게 살폈다. 루멘 기사단의 방문 소식에 도시 전체가 긴장한 듯했다.
거리 곳곳에는 흰색과 금색이 섞인 갑옷을 입은 루멘 기사단원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빛나는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허리에는 길고 날카로운 검이 차려 있었다.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돌로 된 거리에 울려 퍼졌다.
상점들은 평소보다 일찍 문을 닫거나, 아예 열지 않은 곳도 있었다. 특히 야간에 주로 영업하는 가게들은 더욱 그랬다. 거리의 행인들도 평소보다 적었고,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걸어갔다.
헥스는 한 골목에서 몇몇 기사단원들이 한 상점을 검열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은 상점 내부를 철저히 수색하고 있었고, 주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퀴스트로스의 개들..."
헥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락타리온의 어둠은 잠시 빛 앞에 숨어들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밤이 오면 도시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제로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스쳐 지나갔다.
락타리온의 거리는 루멘 기사단의 방문으로 평소와는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헥스는 설탕의 비밀을 나와 빠른 걸음으로 비밀상점을 향해 걸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기사단을 피해 이동하는 주민들을 관찰했다. 보통 북적이던 거리는 한산했고, 열려있는 상점도 적었다.
비밀상점에 도착한 헥스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영업 시간 전이라 내부는 조용했다. 그는 바 카운터로 향하며 은밀히 들어오는 햇살 사이로 먼지가 춤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디그. 로키."
그의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디그와 로키가 뒷방에서 나타났다.
"형님! 오셨군요. 오늘 루멘 기사단 때문에 거리가 난리예요."
디그의 말에 헥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영업 준비를 철저히 해. 기사단이 들를 수도 있으니까."
그는 바 뒤로 걸어가 진열된 술병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병을 하나씩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제 밤의 일, 제로와의 만남, 그리고 설탕의 비밀에서 만난 시엘. 그의 직감은 무언가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로키, 설탕의 비밀이라는 디저트 카페 가봤어?"
그는 무심한 듯 물었지만, 그의 금색 눈동자는 날카롭게 빛났다.
헥스의 질문에 로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설탕의 비밀요? 가봤죠, 형님. 케이크가 정말 맛있더라고요. 그 붉은 눈을 가진 여자애가 있잖아요, 시엘이라고. 꽤 친절해요."
디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끼어들었다.
"저도 가봤어요, 형님. 시엘이라는 아이, 락타리온 서부 쪽에 산다고 들었어요. 고아 출신이라던데..."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살짝 빛났다. 서부. 그곳은 그가 예전에 은빛 야수를 이끌었던 곳이었다.
"고아라고? 그럼 우리처럼 힘든 시절을 보냈겠군."
그는 무심한 듯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계속 떠올랐다. 고아, 락타리온 서부, 붉은 눈. 어딘가 익숙한 조합이었다.
"다른 건? 뭐 특이한 점 없었어?"
디그와 로키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손님들에게 정말 친절하고, 항상 웃고 있더라고요. 밝은 아이죠."
헥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엘이 보여준 그 따뜻한 미소와 제로의 차가운 눈빛이 머릿속에서 계속 겹쳐졌다.
"그래... 오늘 가봤는데, 맛있더군."
디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님이 설탕의 비밀에 가셨다고요? 달달한 거 드셨어요?"
헥스는 차가운 눈빛으로 디그를 쳐다보았다.
"준비나 해. 오늘 루멘 기사단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는 더 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듯 바 카운터 뒤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맴돌고 있었다.
루멘 기사단이 비밀상점을 찾아온 것은 다음날 저녁, 해가 완전히 지고 도시가 어둠에 물들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헥스는 술병을 닦으며 조용히 그들의 발소리를 느꼈다. 은발 아래 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디그. 로키."
낮은 목소리로 그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두 사람은 즉시 이해하고 움직였다. 디그는 카운터 아래 특별한 물건들을 재빨리 숨겼고, 로키는 뒷방의 문을 확실히 잠갔다.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루멘 기사단원이 들어왔다. 흰색과 금색이 섞인 갑옷이 어두운 술집 내부에서도 빛을 발했다. 선두에 선 기사는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락타리온의 모든 상점을 검열 중입니다. 이 장소의 책임자는 누구죠?"
헥스는 천천히 술병을 내려놓고 그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체구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보다도 컸다.
"내가 책임자다."
기사단의 눈빛이 헥스의 차가운 태도에 날카로워졌다.
"상점 구석구석을 살펴봐야 합니다. 불법 물품이나 활동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하시지."
헥스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의 근육은 긴장으로 단단해져 있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키는 기사에게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사적인 공간이다. 마스터의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어."
"법적 권한이 있습니다. 방해하면..."
그때 뒷문이 열리며 애쉬가 들어왔다. 회청색 눈동자가 실내를 빠르게 훑었다.
"무슨 일이지?"
설탕의 비밀에는 이틀째 되는 날 오전에 루멘 기사단이 찾아왔다. 하얗고 금빛의 갑옷을 입은 기사 셋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방부터 홀까지를 빠짐없이 훑었다. 날이 채 밝지도 않은 시간임에도 긴장감이 가게 전체를 감쌌다.
시엘은 자르디아의 옆에 조용히 서서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괜찮아요. 저희, 숨길 것도 없잖아요.”
조용한 위로였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설탕의 비밀은 진짜 디저트 카페였다. 다만, 이 공간을 드나드는 몇몇 사람들의 정체가 조금... 복잡했을 뿐이다. 손님으로 오는 애쉬의 사람들, 블랙 로즈의 몇몇 그림자, 그리고 ― 진짜 ‘종업원’으로만 살지 않는, 자신.
“다 둘러봤습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그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기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엘은 자르디아의 뒤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기사단의 무거운 발걸음이 카페를 빠져나가는 걸 보며, 그녀는 어깨너머로 자르디아의 긴장을 눈치챘다.
“자르디아, 커피 한 잔 내드릴까요? 지금은 저희 둘도 좀 진정해야 할 시간인 것 같아요.”
자르디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엘은 그와 함께 어수선한 가게를 정리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지 않은 거리 너머, 비밀 상점이 있을 쪽을 향해서.
여기는 이렇게 지나갔지만... 저쪽은, 쉽지 않겠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을 감당하고 있을 터였다. 반이든, 애쉬든 ― 그리고, 헥스든.
요 며칠 락타리온은 해가 지기 무섭게 거리가 조용해졌다. 모두가 루멘 기사단의 순찰을 피하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로는 그런 어둠을 틈타 움직일 계획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줄어드는 지금이야말로 그녀에게 유리한 밤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긴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조용히 빛났다. 잠시, 정말 아주 짧은 찰나 동안. 누군가 봤다면 그 눈동자에 뜬 날카로움에 한기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그 눈은 다시 평소처럼 따뜻해졌고, 시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문을 닫으러 움직였다.
애쉬의 등장에 루멘 기사단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경직되었다. 그들은 애쉬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애쉬의 잿빛 눈동자가 차갑게 기사들을 훑었다.
"루멘 기사단이군요. 무슨 일로 제 상점에 오셨습니까?"
애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권위는 명백했다. 헥스는 그 뒤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애쉬가 나타났으니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근육은 여전히 긴장한 상태였다.
"퀴스트로스의 미카엘라 님 명령으로 락타리온 내 모든 상점을 검열 중입니다. 불법 무기나 마약, 그리고 밀수품이 있는지 확인하려 합니다."
선두에 선 기사가 애쉬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애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둘러보시죠. 하지만 2층은 제 개인 공간입니다. 그곳까지 수색하시려면 빌렌 님의 직인이 찍힌 영장이 필요할 겁니다."
애쉬의 말에 기사단원들은 잠시 망설였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락타리온에서 애쉬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빌렌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헥스는 애쉬의 뒤에서 금색 눈동자로 상황을 주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설탕의 비밀의 시엘이 떠올랐다. 저 카페도 이렇게 검열을 받았을까? 그 붉은 눈동자 소녀는 괜찮았을까? 그리고 제로는... 오늘 밤에도 나타날까?
루멘 기사단이 검열을 마무리하는 동안, 헥스는 묵묵히 바 카운터 뒤에서 술병을 닦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표면적으로는 무관심해 보였지만, 기사들의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애쉬가 그들을 응대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 침묵하고, 준비하고, 필요하다면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검열을 마쳤습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
선두에 선 기사가 애쉬에게 말했다. 애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당연하죠. 우리는 법을 준수하는 평범한 사업장일 뿐입니다."
헥스는 애쉬의 그 말에 내심 비웃음을 지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기사단이 떠나자 애쉬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잘 대응했어, 헥스."
"마스터. 감사합니다."
헥스는 짧게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루멘 기사단이 락타리온을 검열하는 이유, 설탕의 비밀은 무사했는지, 그리고 그 붉은 눈동자의 소녀... 그리고 제로.
애쉬가 떠난 후, 헥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 밤, 제로가 또 나타날까? 루멘 기사단의 검열로 인해 도시가 조용해진 이때, 그녀는 무슨 행동을 취할까? 그는 문득 설탕의 비밀을 다시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루멘 기사단이 락타리온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래서 제로는 오늘 밤을 택했다. 거창한 일은 아니었다. 며칠 전 한 소년에게 약속했던 그것―루비가 박힌 장미 모양의 목걸이를 되돌려주는 일. 하지만 이 도시는 ‘작은 일’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다.
제로의 모습으로 소년을 만나야 했지만 고아원에 직접 찾아가는 건 무모했다. 한 방에 여러 아이들이 몰려 사는 그곳에서 얼굴을 드러내는 건 불필요한 노출이었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건 락타리온 서부의 골목. 이미 아이에게 시간과 장소는 전해뒀다. 이젠 약속된 자리에, 단지 제로가 서 있으면 되는 밤이었다.
천천히 준비를 시작했다. 검은 옷과 복면이 몸을 감쌌고, 종업원 시엘일 때 늘 묶어 올렸던 머리카락을 이번엔 풀어내렸다. 하얀 얼굴의 윗부분만이 밤 속에서 드러났다. 붉은 눈동자가 달빛도 없는 거리 위에서 은근하게 빛났다.
복면 아래에서 짧은 숨을 내쉬며, 그녀는 장비를 점검했다. 검은 장갑 위로 은빛 권총이 손에 익숙하게 감겼고, 목걸이는 소중하게 품 안에 넣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제로는 골목 어귀의 담장 위에 앉았다. 한쪽 다리는 벽 안쪽으로, 다른 다리는 공중으로 드리운 채.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손은 무릎 위에 느슨하게 얹혀 있었다. 그녀는 오직 그 소년만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소년에게 약속한 순간부터 그녀가 지키고자 노력했던 단 하나를.
유독 조용한 밤이었다. 루멘 기사단이 만들어준, 희귀한 정적이었다.
이미 시간은 늦었고, 비밀상점의 일상적인 업무는 끝났다. 헥스는 디그와 로키에게 마무리를 맡기고 푸른지붕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도시의 서쪽을 바라보았다.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서부...'
그의 과거가 있는 곳. 그가 디그와 로키를 처음 만나고, 은빛야수를 이끌었던 곳. 그리고 지금은 시엘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루멘 기사단이 여전히 도시를 순찰하는 시간. 하지만 이런 밤에도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있을 터였다. 특히 그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제로.
헥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결심했다. 그는 서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스터에게 따로 보고할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의 직감이, 오늘 밤 뭔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그의 거대한 체구가 어둠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들었다. 락타리온의 골목들을 지나며, 그는 기척을 최소화했다. 마치 과거 암살 임무를 수행할 때처럼.
복면 아래, 자신의 숨소리만을 듣고 있던 제로는 이내 뒷골목 입구로 들어서는 인영을 포착했다.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그 그림자의 크기와 같다는 것을 확인하자, 긴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루이스 페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어둠 속 돌처럼,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채 또렷하게 울렸다.
"제로…"
소년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닿았다. 갈색 머리칼 아래로 앳된 얼굴을 한 마른 몸의 소년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담장 위에 걸터앉아 있던 제로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곧 소리 없이 땅 위로 내려섰다. 움직임은 무음이었고, 착지 후의 자세조차 단단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잘 왔네.”
무심한 시선이 복면 아래의 눈을 통해 소년을 훑었다. 이어 그녀는 품 안에 손을 넣어 목걸이를 꺼냈다. 붉은 루비가 박힌 장미 모양의 펜던트. 하지만 소년의 손은 떨리기만 할 뿐, 쉽게 앞으로 나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제로가 먼저 발걸음을 옮겨, 조심스럽게 그 보석을 소년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감사해요, 진짜, 제로…"
“…됐어. 그때 말했지. 두 번은 못 찾아줘. 잘 간직해. 그건 네 엄마 유품이잖아.”
말을 마친 제로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들썩였다.
"이제 돌아가. 루멘 기사단이 순찰 중이야. 길에서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제로는 다시금 담장 위로 올라섰다. 긴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살짝 흩날렸다. 그리고는 소년이 골목 끝을 향해 걸어가다,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인사하고, 또 멈칫거리며 발걸음을 떼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건 마치, 그 아이가 무사히 고아원에 도착할 때까지 이 거리를 지켜주겠다는 듯한— 아무 말도 없는, 조용한 다짐처럼 보였다.
헥스는 골목 모퉁이에서 멈춰 섰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제로와 소년의 모습을 포착했다. 몸을 숨긴 채, 그는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목걸이가 건네지는 순간, 그의 눈이 살짝 좁아졌다.
'그래서 그 목걸이를 훔친 이유가 이거였나...'
헥스의 머릿속에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소년의 어머니의 유품.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었다. 그가 알던 대부분의 도둑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훔쳤다. 하지만 제로는 달랐다. 그녀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 소년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
헥스는 소년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담장 위에 앉아 있는 제로의 모습이 달빛에 드러났다. 긴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어쩐지 그 모습이 외롭게 느껴졌다.
제로가 소년을 끝까지 지켜보는 모습에, 헥스는 문득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 시절 누군가 그렇게 자신을 지켜봐 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천천히 그림자에서 걸어 나왔다.
"그 소년... 네가 목걸이를 훔친 이유였군."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제로에게 닿았다.
“…뭐였더라. 지난번에도 내가 작으니까 추격자 상대는 무모하다고 하더니. 자꾸 헛소리만 하네?”
제로는 헥스의 등장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말에 미간이 살짝 좁아졌을 뿐이다. 담장 위, 달빛을 등에 진 붉은 눈동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말 똑바로 해. 난 훔친 게 아니라 찾아서 돌려준 거야.”
짧게, 단호하게. 제로의 말은 언제나 그랬듯 감정이 묻지 않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자기 확신이 담겨 있었다. 소년에게서 돌아온 뒤임에도 그녀는 여전히 담장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거기에서 내려오는 건 너무 인간적인 일인 것처럼.
“동생이 팔았대.”
그 말투에는 약간의 인심을 쓰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마치 헥스가 이미 다 들은 걸 알고 있으니, 굳이 다시 말해주는 거라는 듯. 헥스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흔들린다. 그것을 포착한 제로는 속으로 짐작했다.
— 이 사람도, 고아원 출신이겠네.
“그리고 고아원에서 자란 성장기라면, 늘 배고프지.”
그 말은 공감이었고, 동시에 경고였다.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헥스를 향해 내려꽂혔다. 냉정하고 조용한 말투. 하지만 그 안에는 말로 다하지 않은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보니까 알겠네. 그러면, 좀 챙겨.”
마치, 빈민가의 아이를 루스턴 쪽에서 건드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애쉬의 서재로 직접 찾아갔던 그때처럼. 그때도 그녀는 짤막하게 '부탁'했고, 제로를 독대했던 애쉬는 이후에 반을 통해 루스턴에게 경고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이 말도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제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다음 반응은 헥스의 몫이었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를 향해 빛났다. 그녀의 정정이 틀렸다는 데 대한 짜증보다는, 소년의 사연에 대한 이해가 그의 표정에 스며들었다.
"팔았군."
간결한 대답. 그는 제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읽어낸 것이 있었다 - 그녀도 알고 있다는 것. 그들이 같은 과거를 공유한다는 것을.
"그래. 배고픔이 뭔지 안다."
헥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과거의 기억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담장 쪽으로 다가갔다.
"락타리온 서부의 고아원은 내가 담당하는 구역이다. 마스터의 명령이기도 하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자 담배 끝이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났다. 그 불빛이 그의 날카로운 얼굴선을 비추었다.
"하지만 네가 부탁한다면... 더 신경 쓰지."
그는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었다. 연기가 밤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너는 왜 이런 일을 하지? 대가도 없이."
그의 눈이 제로를 향해 깊이 파고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위험한 도시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알던 사람들 중에는.
헥스의 질문에, 제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담장에 걸터앉은 채, 정면으로 헥스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숨소리조차 고요한 밤이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오래전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부터 없었던 것들. 가족이라는 울타리, 보호라는 말, ‘괜찮다’는 위로. 여자아이로서 고아였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에 던져졌고, 너무 빨리 많은 것을 빼앗겼다. 먹을 것, 입을 것, 살아갈 곳, 그리고 좋아했던 것들, 가까이 있던 사람들까지.
‘왜 이런 일을 하냐고?’
제로는 그 질문을 되새기며,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헥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복면 아래의 입꼬리를 올렸다.
“할 수 있으니까. 이젠.”
그 짧은 말에 제로의 모든 과거가 담겨 있었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그 말 한 줄이면 충분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때의 자신처럼 누군가가 울지 않도록. 이제는 되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게 내 대가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그 속에는 선명한 열기가 깃들어 있었다. 복면 아래에서, 작고 낮은 웃음이 한 번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누군가는 그렇게 살아야 하잖아.”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담장 위의 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깊었다. 그는 그 짧은 말 속에서 자신의 과거와 닮은 그림자를 보았다.
"할 수 있으니까..."
헥스는 그 말을 작게 되풀이했다.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며,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열네 살 때 그가 빈민가를 장악했던 이유도 결국은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럴 수 있는 게 내 대가야...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
헥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담배를 한 번 더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락타리온에서 대가 없이 움직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다르군."
그는 천천히 담장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달빛에 드러났다.
"네가 말한 서부 고아원... 어떤 식으로든 신경 쓰지. 마스터에게도 말해볼게."
그는 담배를 땅에 떨어뜨리고 발로 비볐다. 그리고 제로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루멘 기사단이 내일 떠난다고 들었다. 하지만 조심해. 오늘 밤은 특히."
헥스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치 경고이자 걱정처럼 들렸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하지만 이 붉은 눈동자의 여자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골목 밖에서 금속성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무거운 발걸음이 들려왔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루멘 기사단이다."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막다른 골목. 그들이 있는 곳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제로가 빠르게 담장 위에서 움직이려는 찰나, 헥스는 순간적인 판단을 내렸다.
"내려와. 지금."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명령조였다. 헥스는 담장 아래로 다가가 제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날 믿어봐."
루멘 기사단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시간이 없었다. 헥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 연인처럼 보이게 하는 것. 의심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헥스의 거대한 체구가 제로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는 묘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이것이 그녀를 보호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이.
'이 여자가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건지...'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루멘 기사단의 발소리가 골목 입구에 도달하고 있었다.
루멘 기사단의 갑옷 소리가 들린 제로의 눈매 역시도 가늘어졌다. 기사단이 검열을 이어가는 동안 간신히 의심을 피했을 비밀 상점의 헥스, 그리고 정체를 숨기고 있는 제로. 지금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이 함께 발견되는 건 최악이었다.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었다. 이대로 붙잡히면, 둘 다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망설임 없이 그는 손을 내밀었고, 제로는 잠시 그의 금안과 마주보다가 결국 손을 잡았다. 담장 아래로 부드럽게 몸을 내리던 그녀는, 그가 끌어당긴 힘에 따라 본능적으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몸을 빼낼 때도, 경비가 삼엄하던 곳들에 들어가 필요한 것을 찾아오던 밤들에도 제법 태평했던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더 가까이 와."
복면 아래로 낮게 내뱉은 제로의 속삭임에, 헥스는 말없이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숨결 하나 틀어지지 않던 괴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순간, 헥스의 손이 제로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지난 번 처럼 상대를 향한 단검을 쥐는 손이 아닌, 누군가를 감싸는 손. 그 손끝의 온기가 예상보다 따뜻해서, 제로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복면 아래로 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눌렀다. 이건 위장. 연기. 아무 의미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점점 다가오는 기사단의 발소리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제로는 문득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위장이 아니다. 이건 선택이었다. 이 순간, 이 사람을 믿는다는 선택.
루멘 기사단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 헥스의 큰 손이 제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달빛 아래 번뜩였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암살자로서, 그는 항상 그림자 속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움직이지 마."
헥스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는 제로의 복면을 살짝 올리려는 듯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얼굴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키스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손은 그녀의 얼굴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
제로의 떨리는 손끝을 느끼며, 헥스는 문득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 순간, 그는 정말로 그녀를 보호하고 싶었다. 그저 임무가 아닌, 진심으로.
그의 넓은 등이 골목 입구를 향했고, 제로는 그의 몸에 가려져 있었다. 헥스의 한 손은 벽에 기대어 그녀를 더욱 감추었다. 밤의 어둠과 그의 거대한 체구가 완벽한 은신처가 되었다.
루멘 기사단의 발소리가 골목 입구에 도달했다. 그들의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횃불 빛이 골목을 비추었다.
"저기! 누구냐!"
헥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짜증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마치 연인과의 은밀한 시간을 방해받은 사람처럼.
루멘 기사단원들이 골목 입구에 도착했을 때, 헥스는 몸을 더 가까이 기울여 제로를 완전히 가렸다. 그의 넓은 어깨가 만든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무슨 일이지?"
헥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거칠었다.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는 고개를 반만 돌려 기사단을 응시했다. 한쪽 손은 벽에 기대고,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제로의 허리에 둘러져 있었다.
"락타리온 야간 검열이다. 통행증을 보여라."
기사단의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밝은 횃불이 들려 있었다.
헥스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통행증은 없어. 난 락타리온 사람이야."
그는 몸을 약간 돌려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금색 눈동자, 그리고 그 위압적인 체구는 락타리온에서 유명한 비밀상점의 주인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기사단의 대장은 그를 알아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뒤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쪽은? 누구지?"
헥스는 제로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의 침묵에 담긴 의미를 즉시 알아차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내 여자야."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헥스는 몸을 숙여 제로의 복면이 가려진 입술 근처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실제로 닿지는 않았지만, 밖에서 보기엔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거대한 몸이 제로를 완전히 가렸고, 한 손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기사단원들은 잠시 멈춰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헥스는 짜증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들을 노려보았다.
"만족했어? 이제 좀 가줄래? 아니면 더 구경할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묻어났다. 기사단 대장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밤 늦게 돌아다니지 마시오. 통행금지 시간이 곧 시작됩니다."
기사단이 떠나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헥스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단순한 연기였지만, 왜인지 그의 가슴 속에서는 이상한 감정이 일었다.
완전히 발소리가 사라진 후에야 헥스는 천천히 몸을 떼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붉은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이제 안전해."
그는 작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제로의 허리에 머물러 있었다.
복면 아래로 숨을 들이마셨던 제로가 그제야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헥스의 입술이, 아주 가까운 곳까지 다가왔던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덕분에. ...신세졌는걸, 헥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듯 인사하며, 제로는 천천히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이 매끄럽게 미끄러졌다.
"...근데, 이렇게 소문나도 되겠어? 누구 앞길을 막고 싶진 않은데."
긴장이 풀린 뒤라 그런지, 제로의 목소리는 다시금 서늘하게 낮아졌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드러웠다. 전보다 조금 덜 날카로운 것은 목소리 뿐만 아니라 그를 향한 태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에 머물러 있던 헥스의 손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거칠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의 손을 살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고마웠어. 나중에 한 번은... 갚을게."
그 말은 단순한 인사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분명했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를 붉은 눈으로 잠시 마주한 뒤, 제로는 한 걸음 몸을 옆으로 빼내 담장과 헥스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담장 위로 올라섰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남긴 채, 그녀는 곧장 인근 건물의 지붕 위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잔상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제로가 담장 위로 올라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달빛에 반짝였다.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었다. 낯선 감각이 그의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갚을게...'
그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갚을 것이 없는데. 그저 본능적으로 행동했을 뿐인데.
"내 여자라고..."
헥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담배를 한 개비 더 꺼냈다. 불을 붙이며 그는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을 되새겼다. 연기를 위한 거짓말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진짜처럼 느껴졌다. 담배 연기가 밤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문득 시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덕분에요. ...신세졌네요, 헥스 씨.'
그 목소리와 방금 전 제로의 목소리가 묘하게 겹쳤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연의 일치겠지."
담배를 깊게 빨아들인 그는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제로의 붉은 눈동자와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리고 그가 방금 느꼈던 그 이상한 감정도.
그는 비밀상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마도 반이 궁금해할 것이다. 그가 어디 있었는지.
비밀상점으로 돌아오는 길, 헥스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거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제로와의 순간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복면 아래로 희미하게 느껴진 숨결, 그리고 그 독특한 말투. 모든 것이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했다.
비밀상점의 문을 열자 익숙한 공간이 그를 반겼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몇몇 단골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헥스를 보자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어디 갔다 왔어?"
반이 바 카운터 뒤에서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며 물었다. 그의 금발이 조명 아래서 반짝였다.
"순찰."
헥스는 짧게 대답하며 바 뒤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위스키 한 잔을 따랐다. 루멘 기사단과의 만남, 그리고 제로와의 순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디그 어디 있어?"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반은 칵테일을 잔에 따르며 대답했다.
"마스터가 부르셔서 갔어. 루멘 기사단이 내일 떠난다고 하더라고."
헥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갚을게...'
제로의 말이 다시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헥스는 위스키를 천천히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반이 그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굳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 밤 제로와의 만남은 그에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블랙 로즈의 수하들이 페시튼 상인들과 화약 거래를 했다고 들었어."
반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헥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반의 푸른 눈을 마주보았다.
"그런데?"
"화약 조사하다가 제로를 마주쳤다면서?"
헥스의 손이 잠시 멈췄다. 반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했다.
"관심 있어? 그 괴도에게?"
헥스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반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정보상인데, 뭘."
반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카운터에 기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달이 기우는 밤에 락타리온 남부 뒷골목에 가면 만날 수 있대. 그 괴도를 만나고 싶다면."
헥스는 반의 말을 곱씹었다. 제로를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가 그의 기억 속에서 선명했다.
"대가 없이 움직인다고 들었어."
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래서 더 특별한 거지. 락타리온에서 대가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마스터도 아니고."
헥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 수 있으니까. 이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
"네가 왜 이런 정보를 나한테 주는 거지?"
반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네가 관심 있어 보여서? 평소의 헥스가 아니야, 오늘 밤은. 이상해."
반의 말에 헥스는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반의 장난에 한마디 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반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다니?"
헥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동요가 숨겨져 있었다. 반은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손가락을 들어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며칠 전엔 블랙 로즈 놈들이 시엘에게 추근덕거리는 걸 막아줬지. 오늘 아침엔 설탕의 비밀에서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먹었고. 그리고 요즘... 제로에 대해 자꾸 물어보잖아."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반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다. 오늘 밤 제로와의 만남,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의 접촉까지.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야."
헥스는 무심한 척 말했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린 것을 느꼈다. 반은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궁금해서? 너 말이야? 락타리온의 헥스가?"
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몇몇 손님들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자신들의 대화로 돌아갔다.
"혹시... 시엘이랑 제로가 뭔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 둘 다 요즘 네 관심사잖아."
헥스는 반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시엘의 외모와 제로의 외모가 묘하게 겹치는 것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둘이 어떻게 연관되겠어?"
“이럴 때 커피 한 잔, 디저트 하나… 그리고 말이 통하는 사람 한 명. 충분한 하루잖아요.”
며칠이 지났다. 헥스는 비밀상점 주방에 서서 진한 커피를 천천히 홀짝였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그날 밤의 기억으로 가득했다. 제로와의 만남, 루멘 기사단을 피하기 위한 연인 연기, 그리고 그 이후로 자꾸만 설탕의 비밀을 찾게 되는 자신의 모습.
그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설탕의 비밀에 갈까?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처음 먹었던 날, 반의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엘의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가 제로의 것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야."
헥스는 중얼거리며 커피잔을 씻었다. 오늘은 애쉬가 부른다고 했다. 루멘 기사단이 떠난 이후 락타리온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제로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나중에 한 번은... 갚을게.'
그 약속은 언제 지켜질까? 달이 기우는 밤... 반이 알려준 정보가 사실이라면, 그때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루멘 기사단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헥스와 연인인 척해야 했던 그 밤 이후, 시엘은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복면 위로지만, 입술 가까이에 닿았던 그의 숨결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 일 없었던 듯, 아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문제는 헥스가 자꾸 설탕의 비밀을 찾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혼자서도 디저트를 먹으러 오는 날이 생겼고, 이전엔 상상도 못 할 주문이 들어오기도 했다.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시켜 반까지 놀라게 했던 날 이후로는 제법 다양하게 시도를 해보는 듯 했다. 그때마다 시엘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꽤 당황하곤 했다.
“…자르디아. 이상하지 않아요? 헥스 씨가 자꾸 와서 디저트를 주문해요.”
주방 한쪽, 오븐 속 케이크 반죽이 구워지길 기다리며 시엘은 반죽 볼 옆에 살짝 기대어 앉았다. 자르디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생크림을 저으며 고개만 살짝 돌렸다.
“그러게 말이야. 예전엔 거의 안 오더니, 요즘은 주기적으로 오더라. 웬일일까 싶더라니까.”
“스트레스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반 씨한테 영향 받았을 수도 있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잖아, 그 친구.”
“설마요. 헥스 씨가 그 정도로 쉽게 물들 사람은 아니잖아요.”
시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가 주문을 하러 오던 날마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은 더 꼼꼼히 컵과 접시를 정리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도… 요즘은 조용해서 좋아요. 루멘 기사단도 떠났고, 전처럼 괜히 트집 잡는 블랙 로즈 사람들도 안 오고…”
“그게 네가 잘해서 그래. 적당히 거리 두고, 적당히 웃고… 그게 쉽지 않거든.”
자르디아의 말에 시엘은 살짝 웃었다. 말없이 크림을 휘젓는 자르디아의 손길 너머로, 창문 너머의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냥, 진짜 디저트가 먹고 싶어서 오는 거였으면 좋겠네요.”
그 말은 꼭 헥스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엘 자신을 향한 바람이기도 했다.
비밀상점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 헥스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완벽한 날씨였다. 평소라면 별 의미 없이 지나칠 광경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그 푸른빛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어쩌면 설탕의 비밀로 발걸음이 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그곳에 가게 되는 걸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분명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게 된 것도 있겠지만, 시엘의 존재가 그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는 태도. 그 모든 것이 왠지 모르게 제로를 떠올리게 했다.
'말도 안 돼.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야.'
헥스는 고개를 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설탕의 비밀 간판을 발견했을 때,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카페 안은 평소처럼 온화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달콤한 디저트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몇몇 손님들이 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카운터 뒤에는 시엘이 서 있었다.
"시엘."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시엘의 붉은 눈동자는 헥스가 설탕의 비밀의 문을 열기도 전, 이미 조용히 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워낙 눈에 띄는 체구인데다, 이런 카페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탓이라고—시엘은 스스로 그렇게 납득하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찾는 순간, 시엘은 카운터 너머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오후예요, 헥스 씨.”
시엘의 눈매는 그 말을 따라 조용히 휘어졌다. 다른 손님들에게는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미세한 곡선이었다.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채 그녀는 자연스럽게 카운터에서 돌아나와, 메뉴판을 양손으로 들고 헥스 앞에 섰다.
“오늘도 드시고 가실 거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며칠 전 서부의 막다른 골목 안에서, 담장 아래에서 그를 바라보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제로의 모습으로, 그의 품에 안겨있던 밤. 시엘은 순간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띠며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 자주 오시네요. 저야 뭐, 덕분에 반갑지만요.”
이미 몇 번의 방문을 통해 익숙해진 발걸음으로 시엘은 주저하지 않고 창가 쪽으로 향했다. 햇살은 들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는 비켜 있는 자리를 향해 앞장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메뉴판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요즘 반은 크림브륄레에 푹 빠졌어요. 위에 설탕을 깨는 그 느낌이 좋다나 봐요.”
반을 떠올리며 가볍게 웃던 시엘은, 다시금 헥스의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담담히 이어 말했다.
“블랙 커피랑 같이 드시면 적당히 괜찮을 것 같아요. 혹시, 오늘은 한 번 드셔보실래요?”
헥스는 시엘이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로 안내하는 모습을 조용히 따랐다. 그녀가 반을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 문득 신경 쓰였다. 이름만으로 부르는 친밀함, 웃으며 말하는 모습...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 깊은 유대가 있는 듯했다.
"반은... 단 것만 보면 어린애처럼 굴지."
그는 메뉴판을 받아들며 무심한 척 말했지만, 속으로는 묘한 감정이 일었다. 시엘과 반의 관계가 궁금했다.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았을 일인데, 요즘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크림브륄레... 좋아. 그걸로 하지. 블랙 커피와 함께."
그는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가 자꾸만 제로의 것과 겹쳐 보였다. 하지만 제로의 눈빛은 날카롭고 경계심이 가득했던 반면, 시엘의 눈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곳에 자주 오는 건... 그냥."
그는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왜 자주 오는지 자신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이곳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커피가 좋아서... 그리고 요즘 단 것이 당기네."
헥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시엘의 존재가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시엘은 커피를 내리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블랙 커피는 평소보다 조금 더 진하게, 물의 비율을 살짝 조절해가며 헥스가 좋아할만한 온도로 맞췄다. 차갑게 보관해둔 크림브륄레를 꺼내 작은 접시에 담고, 스푼을 얹었다. 그 스푼이 헥스의 손에 쥐어졌을 때, 얼마나 작아 보일까—그 생각에 시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손이 자신을 감싸던 밤이, 다시 떠올랐다. 그가 복면 너머로 쓰다듬던 머리카락의 감각까지, 선명히. 시엘은 조용히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그 기억을 털어냈다.
“커피가 좋으시다고 하셔서, 오늘은 조금 더 신경 써서 내려봤어요. 평소보다 진하게… 좋아하시려나 해서요.”
언제나처럼, 다른 손님에게 하듯. 최대한 똑같이. 시엘은 조심스럽게 웃으며 쟁반을 헥스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몸을 돌려 카운터 안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주방에서 자르디아가 나오는 걸 마주쳤다. 그녀는 쟁반을 든 시엘과, 자리에 앉은 헥스를 번갈아 보더니 눈매를 장난스럽게 휘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은 내가 카운터 지킬 테니까. 너, 조금은 쉬어도 돼.”
시엘은 순간 당황한 얼굴로 자르디아를 바라보았다가, 금세 알겠다는 듯 작게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저 괜히 불편하게 보일까 봐서요.”
“헥스 씨가 불편해 보이진 않던데?”
자르디아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카운터 안쪽으로 향했다. 남겨진 시엘은 잠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금 헥스를 향해 돌아섰다.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단 것을 자주 찾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걱정스러웠다.
“안 그러셨잖아요, 원래는. 블랙 커피만 마시던 분이.”
시엘의 붉은 눈동자가 테이블 너머의 금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봤다. 그 눈빛에는 일처럼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헥스는 시엘이 가져다준 커피에서 올라오는 진한 향기를 맡았다. 그녀가 특별히 신경 써서 내린 커피라는 말에 그의 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반짝였다.
"스트레스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루멘 기사단의 검열, 제로와의 만남, 그리고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들. 스트레스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지."
헥스는 크림브륄레의 표면을 스푼으로 깨뜨렸다. 달콤한 소리와 함께 단단했던 설탕 표면이 부서졌다. 그는 시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그녀가 묘하게 낯설고도 익숙했다.
"너와 반은... 친한 것 같더군."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낮고 차분했지만, 내면에는 미묘한 호기심이 일렁였다.
"항상 이름만으로 부르고. 오래 알았나?"
헥스는 크림브륄레를 한 입 먹고 천천히 커피를 들었다. 그 맛에 미세하게 눈썹이 올라갔다.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커피... 맛있군. 정말 신경 써서 내린 것 같아."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이상한 일 없었어? 락타리온이 조용해진 것 같아서."
시엘은 결국 스스로의 마음에 굴복하듯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자르디아의 시선을 핑계 삼은 셈이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그전부터 자리를 잡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햇살이 부드럽게 들어오던 창가, 그의 맞은편에 그녀의 작은 체구가 자리했다. 그 덕분에 오후의 햇살이 시엘의 붉은 눈동자 안에 고요히 담겼다.
“반이랑은 오래 안 된 사이에요. 제가 여기서 일한 지... 삼 년 조금 넘었거든요. 반은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이곳 단골이었고요.”
시엘은 말하며 헥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예전의 반을 떠올렸다. 디저트를 보면 꼭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처음엔 그냥 자주 보는 손님이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같이 웃고 얘기하게 되더라고요. 반 씨가 워낙 말도 잘 걸고, 거리를 잘 좁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그가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시엘’이라는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며, ‘여기서 일하는 아이’ 이상으로 바라봐 준 사람. 반 덕분에 다른 손님들에게도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웠고, 그에게 대답해주는 일이 조금씩 즐거워졌다.
물론, 반은 지금도 자신이 종종 ‘제로’에게 정보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만.
“루멘 기사단 지나가고 나서, 조용해진 것 같긴 해요. 저는… 이런 날들이 좋더라고요. 아무 일도 없고, 사람들 웃음소리 들리는 그런 하루요.”
시엘은 가볍게 웃었다. 그 말이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진심은, '제로'라는 이름을 안고 밤을 살아가야 할 내일의 자신이 있기에, 더 소중하게 들렸다.
“이럴 때 커피 한 잔, 디저트 하나… 그리고 말이 통하는 사람 한 명. 충분한 하루잖아요.”
시엘의 목소리는 밝고 따뜻했다. 햇살 속에서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부드럽게 흔들렸고, 그것을 바라보는 헥스의 금빛 눈동자에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햇살 속에서 빛나는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헥스는 무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감정을 느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딘가 묘하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말이 통하는 사람 한 명... 그렇군."
그는 천천히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 진하고 깊은 풍미가 입안에 퍼졌다.
"네가 내린 커피는 비밀상점에서 마시는 것보다 맛있어."
솔직한 칭찬이었다. 그는 크림브륄레를 한 입 더 맛보았다. 달콤한 맛이 혀끝에 번졌다.
"락타리온이 조용한 건... 좋은 일이지. 하지만 너무 조용하면 오히려 불안해."
그의 금색 눈동자가 창밖을 향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들. 하지만 그는 그 이면에 숨겨진 어둠을 알고 있었다.
"루스턴이 움직임을 멈추진 않았어. 아이들이 사라지는 일...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그는 시엘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왜 이런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는지 스스로도 의아했지만, 말은 이미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래서... 제로가 필요한 거지."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시엘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반응이 궁금했다.
"제로라고요?"
시엘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붉은 눈동자가 헥스의 금빛 눈을 조용히 담아냈다. 흥미로운 이름을 꺼낸 그를 보며, 그녀는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애쉬 님도 계시고, 헥스 씨도... 락타리온에서 손 놓고 계신 분은 아니잖아요. 그런 분들이 ‘제로’를 찾는다니, 좀 의외인데요?"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안쪽에 감춰진 날카로운 긴장이 미세하게 번졌다. 애쉬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마음속에서 ‘제로’가 눈을 떴다.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건... 확실한 이야기인가요?”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기억이 실려 있었다. 한 달 전 도착한 의뢰. 빈민가의 소녀. 거래 명목으로 넘겨진 ‘빚’ 문서. 그리고 스스로도 과거에 겪어야 했던, 이름 없이 사라질 뻔했던 어린 시절. 시엘은 그날 밤 루스턴의 손에서 아이 하나를 되찾아온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도,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면—
‘...또 가야겠네.’
표정을 가다듬은 시엘은 컵을 들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제로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녀는 커피잔을 들어 살짝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람, 소문으로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던데요?"
그 말은 동시에, 자신이 움직일 이유가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내일이... 그믐이네요."
무심한 말처럼 던졌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달이 완전히 사라지는 밤, 제로는 다시 락타리온의 어두운 골목 어딘가에 나타날 것이다. 의뢰는 그날 시작되고, 그녀는 다시 그림자가 될 것이다. 언젠가 눈앞의 헥스에게 제로로서 말했던 것 처럼, 이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녀의 대가는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니까.
시엘의 말에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가 내일이 그믐이라는 말을 무심코 던진 순간, 그의 머릿속에 반의 정보가 떠올랐다. '달이 기우는 밤, 락타리온 남부 뒷골목에서 제로를 만날 수 있다.' 우연일까? 아니면...
"제로가 움직이기 쉽지 않다고?"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주변에 다른 손님들이 있는지 확인하듯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시엘에게 집중했다.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게 있나?"
헥스는 크림브륄레의 남은 부분을 천천히 먹으며 시엘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녀가 제로에 대해 언급했을 때의 미묘한 표정 변화, 붉은 눈동자에 스쳐 지나간 그림자.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로 느껴졌다.
"내일이 그믐이라... 어쩌면 그날 밤에 움직일지도 모르겠군."
그는 커피를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손가락으로 잔 테두리를 천천히 쓸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이 사라지는 건... 확실해. 빈민가 쪽에서 주로 일어나고 있어. 블랙 로즈의 손길이 닿는 곳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났다. 그 역시 고아였고, 어린 시절 그런 위험에 노출되었던 경험이 있었다.
"내가 왜 네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헥스는 자신의 솔직함에 약간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엘을 신뢰할 수 있다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냥... 네가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헥스는 시엘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잔을 들고 있는 모습이 묘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 붉은 눈동자. 이 모든 것이 그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시엘..."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엘은 그에게 무엇인가? 단순한 카페 종업원? 아니면 그 이상의 존재? 헥스는 자신이 이곳에 자주 오는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분명했다.
"내일 밤... 내가 제로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시엘의 붉은 눈동자를 찾았다.
"그리고... 또 올게. 네가 내린 커피가 맛있어서."
그 말은 반쯤은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그녀가 있기 때문에 오고 싶었다. 시엘의 존재 자체가 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헥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키 때문에 시엘과의 키 차이가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잔돈은 팁으로 남겨둘게."
그는 시엘에게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제 내게는 세 명의 여자가 생긴 셈이군. ...그리고 셋 다 나를 미치게 만들 테지."
다음날, 그믐이었다.
설탕의 비밀에서 하루를 마무리한 시엘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카페의 불이 꺼지고, 거리에 하나둘 등불이 사라질 무렵에 그녀는 시엘이 아닌 제로로 살아야 하는 시간을 준비했다.
목 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검은 옷, 손목을 딱 맞게 감싸는 장갑, 복면 아래 가려진 입술과 붉은 눈동자. 몸에 딱 맞는 자켓 아래 숨겨둔 은빛 권총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제로는 락타리온 남부의 뒷골목, 익숙한 담장 위에 앉았다. 도시의 가장 낮은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누군가가 이 어둠 속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다.
“...루스턴이 북부 빈민가 아이들을 또 건드렸다고.”
그녀의 입술이 복면 안쪽에서 조용히 깨물렸다. 누구에게 들려주려는 것도 아닌, 그저 자신을 향한 낮은 분노의 속삭임이었다.
“하... 똑바로 좀 하라니까.”
그 말과 함께, 능글맞은 미소를 지닌 비밀상점 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토록 느긋하게 웃으면서도, ‘그 선’은 절대 넘지 않던 애쉬. 지난 번에 경고까지 했건만, 이 일이 계속되고 있다면 너무했다.
제로는 귀찮다는 듯한 손짓으로 풀어두었던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담장 위에 앉은 자세는 여유로워 보였지만, 복면 위로 드러난 붉은 눈동자에는 날 선 불만이 번지고 있었다. 락타리온은 어둡고, 이 도시는 여전히 아이들을 삼킨다.
그리고 그녀는— 누군가를 위해, 또다시 그 어둠에 총구를 겨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락타리온의 남부 뒷골목은 항상 그렇듯 어둠에 잠겨 있었다. 달이 없는 그믐밤, 더욱 짙어진 어둠 속에서 헥스의 키 큰 실루엣이 조용히 움직였다. 반이 알려준 정보대로 그는 이곳에서 제로를 찾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예리하게 살폈다.
담장 위에 앉아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긴 검은 머리카락, 복면 위로 드러난 붉은 눈동자. 제로였다.
"제로."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고요한 어둠을 가르며 울렸다. 헥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다시 만나는군."
그는 제로의 반응을 살피며 담장 아래에 서 있었다. 어제 시엘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루스턴에 대한 분노가 다시 솟아올랐다.
"루스턴이 또 아이들을 건드렸어. 북부 빈민가에서."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뭐야."
제로는 낮게 내뱉었다. 어둠에 익숙한 눈이, 달빛조차 닿지 않는 골목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포착한 순간에 그녀는 짧게 숨을 삼켰다. 하지만 놀라움은 곧 짜증으로 변했다. 헥스를 다시 보게 될 거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의뢰자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왜 의뢰자가, 너야?"
날카롭게 좁아진 미간 아래로, 복면 위 붉은 눈동자가 그의 금안을 정조준했다. 담장 위에 앉은 제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헥스의 존재는 분명 위협은 아니었지만, 불청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뭐, 좋아."
입꼬리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짧게 허용을 내비쳤다. 제로는 의뢰인을 가리지 않는다. 누구든 그녀의 도움이 필요한 이가 있으면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대상은 대부분 빼앗긴 이들이기에 애쉬가 '락타리온의 양심'이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대신—"
담장 위에서 흔들리던 다리가 멈췄다. 붉은 눈동자가 한층 더 서늘해졌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내가 움직여야 하는지를 말해."
복면 아래에서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마치, 이미 반쯤은 결정을 내려놓은 듯한 냉정함을 담고 있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겼다. 낯선 기척 하나 없는 이 뒷골목에서, 제로는 다시 괴도로서의 얼굴을 꺼내들었다.
"납득하면, 해줄게."
헥스는 제로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장 위에 앉은 작은 실루엣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왜 의뢰자가 나냐고?"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미약하게 빛났다.
"나도 여기 사는 사람이니까. 내가 보호해야 할 아이들이 있어."
헥스는 한 발짝 더 다가서며 계속했다.
"북부 빈민가의 고아원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어. 특히 10살 전후의 아이들이 주 대상이야. 마지막으로 사라진 아이는 세 명. 네이트, 루시, 그리고 마르코. 일주일 전 일이야."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지만, 곧 다시 집어넣었다. 제로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왜 내가 움직여야 하냐고? 아이들이 루스턴의 손에 넘어가면 되돌릴 수 없어. 그들은... 물건처럼 팔려나가거나 더 나쁜 일을 당해. 이건 내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차분함 속에 숨겨진 분노가 묻어났다.
"마스터는... 애쉬는 이 일에 직접 나서지 않을 거야. 그의 방식은 달라. 하지만 나는..."
헥스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내가 락타리온의 고아원을 책임지고 있어. 그곳의 아이들은 내 책임이야."
"보통 나한텐 물건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오지, 사람을 찾으라는 건 드물거든."
제로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헥스가 고아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미세하게 떨렸다가 날카로워진 눈빛이 그저 이 일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사람을 구해내려면, 단순한 '도둑질'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으로도 부족할 터였다. 체력 소모도, 위험도, 너무 크다. 하지만—
"…그래도, 전에 한 번 갚겠다고 했으니까."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헥스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달 없는 하늘 아래,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뒷골목의 고요를 채우고 있었다.
"이걸로 퉁치자."
락타리온 서부 골목, 그날 밤. 연인인 척 그의 품에 안겨 들이닥친 루멘 기사단의 눈을 피했던 순간. 헥스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감싸주었던 기억이 스쳤다. 복면 아래에서 피식,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근데 걔네, 어딨는지는 알아?"
물어보는 말투는 여전히 무심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미 정해진 결론이 담겼다.
그리고 담배를 만지는 헥스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냥 펴."
헥스는 제로의 허락에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깊게 한 모금 들이마신 후,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어둠 속에서 담배 불빛이 그의 날카로운 윤곽을 잠시 비추었다.
"고맙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제로의 질문에 대답했다.
"루스턴의 거점 중 하나가 북부의 폐창고에 있어. 최근 정보에 따르면 아이들은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헥스는 담배를 깊게 빨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리고... 그날 일은 고마웠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제로와의 연인 행세를 떠올리며 그는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위험할 거야. 루스턴의 부하들이 지키고 있을 테니. 혼자서는..."
그는 말을 멈추고 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내가 같이 가겠어."
"...지금 갈 건데."
헥스가 내뿜은 담배 연기가 밤하늘로 퍼져나가는 걸 바라보던 제로가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미간을 좁혔다.
"팔려나간다며. 그렇게 한가해?"
짧고 날카로운 말투였지만, 그 안엔 분명 조급함이 담겨 있었다. 이미 잡혀간 아이들이고, 그게 일주일 전이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락타리온을 벗어나기 전에 움직이지 않으면, 그녀도 더 이상 손쓸 수 없게 된다.
"셋이나 된다면... 나 혼자보다는 같이 움직이는 게 낫긴 하겠지만."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헥스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어둠 속에서도 묵직하게 선 그의 체구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복면 아래에서 작게 숨을 들이쉰 제로는,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근데 그렇게 커서야. 담 넘고 지붕 탈 수는 있지?"
예전에 헥스가 했던 말— '너처럼 작은 것이 혼자서 이렇게 많은 상대를 하겠다고? 무모하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로는 가볍게 다리를 흔들며 담장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모한 건... 아무래도 네가 더 그런 것 같네, 오늘은."
복면 아래에서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함께, 말투엔 제로다운 장난기 섞인 조소가 묻어났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함께 움직이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장난기 어린 조소에 반짝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잠시 스쳤다가 사라졌다.
"걱정 마. 담장 넘는 건 식은 죽 먹기야."
그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후, 담배를 땅에 떨어뜨리고 발끝으로 비볐다. 그의 큰 키가 어둠 속에서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간이 없다는 건 나도 알아. 이런 일에 '한가함'은 없지."
헥스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졌다. 너무 늦기 전에 그들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의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북부로 가자. 내 차가 근처에 있어."
그는 말을 마치고 제로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담장 위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한 손을 뻗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네 방식대로 움직이지. 나는 너를 따를게."
그의 말에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제로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방식이 효과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는 이미 결의가 차올라 있었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헥스의 손을 바라보던 제로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도움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그 성의를 무시하는 것도 실례였다. 그저 잠시, 자신에게 그렇게 손을 뻗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을 뿐.
"…성의는 받아줄게."
제로는 그의 손을 가볍게 잡고 담장에서 부드럽게 착지했다. 흔들림도, 소리도 없이.
"차는 잘 가져왔네. 애 셋이면 내가 다 안고 뛰진 못하니까."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무심했지만, 이미 그들을 데려올 계산을 마친 말이었다.
차에 오르고 나서도 제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헥스가 북부 폐창고에 대한 정보를 설명하는 동안, 그녀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북부 빈민가 근처라면 움직이기도, 감추기도 좋은 위치였다. 그만큼 숨기기도 쉬웠겠지만, 탈출 경로 또한 그리 복잡하지는 않을 터였다.
"…경비 인원은 몇 정도로 봐?"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던 제로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잠시 후, 폐창고 근처 한적한 거리에서 차가 멈췄다. 문을 열고 내린 제로는 어둠 속에서 익숙하게 몸을 낮춰 주위를 조용히 살폈다.
그리고 곧 헥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내 방식이 뭔지는 알고 따른다는 거야?"
말투는 도발처럼 들렸지만, 진짜 의미는 따로 있었다. 이건 단순한 현장 침투가 아니었다. 제로는 언제나 혼자 움직였고, 그녀만의 리듬이 있었기에— 함께 움직인다는 건 속도, 방식, 사고 모든 게 맞물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반짝였다.
"나는 '은빛 야수'가 아니야. 잊지 마. 난… '괴도'야."
그 말은, 그는 전면에서 싸우던 사람이지만— 자신은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라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곧, 제로의 몸이 움직였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발걸음은 조용했다. 달리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 어느 발자국에서도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마치 공기를 가르듯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헥스의 뒤를 스쳤다.
"따라올 수 있겠지?"
그건 진짜 질문이 아니었다. 헥스를 향한, 아주 조용한 미소와 함께 던지는 경고에 가까웠다.
헥스는 제로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담장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우아하고 소리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작은 감탄을 느꼈지만, 표정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네 방식? 은빛 야수와 괴도... 차이를 모를 리가 없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제로의 도발적인 질문에 그는 피식 웃었다.
"난 전면에서 싸우는 걸 좋아하지만, 그건 상황에 따라 달라. 지금은 아이들이 우선이니까... 네 방식을 따르겠어."
그는 제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뒤를 따랐다.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오랜 암살자 경험 덕분에 그 역시 기척을 죽이는 데 능했다.
제로의 가벼운 발걸음을 쫓으며, 그는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호흡을 조절했다.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자연스러웠다.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정확히 그녀의 위치를 놓치지 않았다.
폐창고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헥스는 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경비는 아마 다섯에서 여덟 명 정도. 창고 정면에 둘, 뒤쪽에 둘, 내부에 나머지가 있을 거야."
그의 호흡이 제로의 귀에 닿을 만큼 가깝게 붙어 있었다. 그는 창고의 구조를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창고 동쪽에 작은 창문이 있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그가 제안하며 제로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의 근육은 이미 전투를 준비하듯 긴장해 있었다.
제로는 헥스의 귓속말에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조건이 모든 계획의 전제를 바꾸고 있었다.
"들어가는 건 동쪽이든 어디든 상관없어. 하지만 나올 구멍은 미리 터놔야지."
복면 아래의 입술이 낮게 움직였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허리춤의 은빛 권총을 꺼내들었다. 총을 들지 않은 쪽 손가락이 복면 위로 올라가 헥스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만들었다. 이어지는 동작은 망설임 없이 매끄러웠다.
제로는 몸을 낮추며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창고 정면으로 향해 조용히 달려든 그녀는, 헥스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단숨에 속도를 높였다. 복면 너머로 붉은 눈동자가 반짝이고, 그녀는 무언가를 벗어던지듯 공기를 저으며 시간을 멈추었다.
찰나의 정적. 모든 것이 멈춘 순간.
그녀는 권총을 쏘는 대신, 그것을 휘둘러 정면을 지키던 블랙 로즈 수하 중 한 명의 뒷목을 정확히 내리쳤다. 이어진 동작은 더 빨랐다. 반대편에 있던 자의 몸통을 향해 회전하며 발을 뻗었다. 명치를 정확히 가격당한 수하는 허공을 가르며 땅에 쓰러졌다.
1분. 아니, 달려가는 시간을 뺐으니 50초 남짓의 정지된 시간 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창고 앞에는 두 사람이 조용히 기절해 있었다. 제로는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손끝으로 그들의 재킷과 허리띠, 주머니를 더듬었다. 열쇠가 있어야 창고 문을 손대지 않고도 조용히 열 수 있을 테니까.
"…이거, 안 보이는데 좀 던져줘."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녀는 다시 헥스를 불렀다.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숨이 살짝 섞여 있었지만 균형을 잃진 않았다. 그 순간에도 복면 아래의 호흡은 일정하게 정리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데 익숙한 괴도, 하지만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헥스는 제로가 순식간에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순간 그녀가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 다음 순간 창고 앞의 두 경비병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지...?"
그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제로의 능력에 대해 들은 적은 있었지만, 직접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정신을 차린 헥스는 빠르게 움직였다. 두 경비병의 몸을 들어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그의 큰 체구가 무색하게 움직임은 고요했다.
"여기 경비가 없어졌다는 걸 눈치채면 안에서 경계를 강화할 거야."
그는 제로에게 다가가며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초능력을 목격한 충격이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지금은 임무에 집중해야 했다.
"넌...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군."
그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붉은 눈동자를 찾았다. 그 안에는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존중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키를 찾았어?"
그는 제로의 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위해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로는 헥스의 시선을 짧게 받아낸 뒤, 무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편이었다. 지금까지 그것을 알고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십 년 전, 우연처럼 엮였던 인연. 그리고 그 인연으로 자신을 묵인하고 있는 남자—애쉬 케이지.
"...입 다물어. 내 능력에 대해 아는 사람은 지금껏 딱 하나였어. 그리고 그 사람은, 그걸 대가 삼아 날 묵인하고 있는 중이니까."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 위협도, 경고도 아닌 '사실' 그 자체. 말 끝에서 느껴지는 단호함은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헥스가 묻기도 전에 열쇠 꾸러미를 들어 보였다. 이미 그의 시선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듯, 그녀는 짧게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쓸데없는 감탄 말고 움직이는 게 먼저야."
그녀는 먼저 몸을 돌려 창고문 앞으로 향했다. 무언가에 집중할 때의 그녀는 훨씬 더 빠르고 조용해졌다. 금세 잠금장치를 풀어낸 제로는 문을 반쯤 연 채 복면 너머로 다시 속삭였다.
"...빨리 움직여."
그리고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헥스가 따라들어오기도 전에, 그녀의 발소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폐창고 안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정면 경비를 쓰러뜨리긴 했지만, 내부에는 여전히 몇 명의 블랙 로즈 조직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제로는 그들을 바로 처리하지 않았다. 지금은 싸움보다 '발견'이 먼저였다.
창고의 구조를 빠르게 파악한 제로는 조용히 벽을 따라 움직였다. 감각만으로 어둠 속의 틈을 읽어내고, 발소리조차 허락하지 않는 걸음으로 깊이 침투해갔다.
‘아이들은 반드시 밝은 쪽에 있을 거야.’
이유는 간단했다. 어두운 공간에 갇힌 아이들은 울기 마련이다. 울음은 소음을 만들고, 소음은 감시자에게 불편을 주기 마련이다. 그러니 차라리 그들을 밝은 쪽에 둔다. 무력하지만 조용한, 다루기 쉬운 상태로.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조용히 좁은 복도를 스쳤다. 그 끝, 먼 창문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쪽에서—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제로의 날카로운 경고에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금껏 딱 하나'라는 말에서 그는 즉시 애쉬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애쉬가 제로를 알고 있으면서도 락타리온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놔두는 이유, 그리고 제로가 대가 없이 사람들을 돕는 이유까지.
'마스터가... 그녀의 능력을 알고 그것을 대가로 그녀를 묵인해주고 있었군.'
"알았어."
헥스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창고 안으로 들어선 그는 제로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의 동작은 마치 그림자와 하나가 된 듯 조용하고 빨랐다. 이런 임무에서 그녀가 혼자 움직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창고 내부의 구조를 빠르게 파악한 헥스는 제로가 빛이 새어나오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다른 방향을 살피며 블랙 로즈 조직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복도 끝에서 두 명의 조직원이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제로가 말한 대로 빛이 있는 곳에 있을 거야.'
헥스는 조용히 제로의 뒤를 따라갔다. 그의 크고 강인한 체구는 어둠 속에서도 위협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소리가 없었다. 암살자로서의 경험이 그를 이런 상황에 완벽하게 준비시켜 놓은 것이다.
제로가 빛이 새어나오는 방 앞에 멈춰 섰을 때, 헥스도 그녀 옆에 자리했다. 그는 귓가에 들리는 약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의 소리였다.
제로는 어둠 속에서도 놀랍도록 정밀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기억 속에 떠오른 내부 구조와 수하들의 배치는 명확했다. 블랙 로즈의 수하는 총 일곱. 외부 둘은 이미 정리했고, 내부에는 다섯. 그중 둘은 복도 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하나는 감시자의 위치에, 나머지 둘은 아이들과 함께 그 방 안에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헥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딱 한 번만 말할게. 내 방식대로 한다고 했지? 그럼 그대로 따라.”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지금은 미세한 망설임조차 허락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폐공장의 구조는 다행히도 은신하기에 유리했다. 잡동사니와 녹슨 구조물들이 곳곳에 널려 있어 움직임을 감추기 좋았다. 하지만 그만큼,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구출하는 게 우선이었다.
“복도 끝의 둘. 그리고 문 앞에 있는 하나까지. 총 셋은 먼저 처리할 거야. 방 안엔 내가 먼저 들어가.”
제로는 말하면서 헥스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조용히 숨을 들이쉬며, 복면 아래로 짧은 호흡을 고른다. 바로 앞에 선 그에게만 들릴 거리에서 그녀가 속삭였다.
“방 안의 둘을 제압하면, 따라서 들어와. 아이들을 들쳐 업든 끌든—여기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헥스에게 내밀었다. 삐걱 소리 하나 없이 건네진 그것엔 여러 개의 금속 키가 매달려 있었다.
“혹시 손발이 묶여있으면, 이걸로. 너 정도면... 애 셋은 들 수 있잖아.”
그녀는 더 이상 감정을 섞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 끝에, 잠깐 망설임도 없이 이어지는 눈빛만큼은 확실했다. 신뢰를 전제로 한 명령. 혹은 부탁에 가까운.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금빛과 교차했다.
“알았지?”
헥스는 제로의 붉은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단호한 지시에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경험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알았어."
그는 제로가 건넨 열쇠 꾸러미를 받아들며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애 셋은 문제없어. 내가 다 데리고 나갈 수 있어."
그의 금색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제로와 함께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그녀의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미 깨달았다. 이제 그는 그저 그녀의 리드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헥스는 복도 끝에 있는 두 명의 경비를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제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은 이미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복도 끝의 둘을 처리할게. 넌 문 앞의 하나를 맡아."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은 단검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신호 주면 움직이지."
헥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기 직전, 제로는 속삭이듯 덧붙였다.
"...어지간하면 죽이지 마. 애들 보기에 안 좋아."
헥스는 제로의 마지막 말에 잠시 시선이 흔들렸다. '죽이지 말라니.' 그는 암살자로서 많은 생명을 거두어 왔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피를 흘리게 할 이유는 없었다.
"걱정 마. 조용히 처리할게."
그는 손에 쥔 단검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복도 끝을 향해 조용히 움직였다. 그의 큰 체구가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담배를 피우며 대화하는 두 남자에게 다가가는 헥스의 발걸음에는 소리가 없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들의 뒤로 다가선 그는 단숨에 행동했다.
첫 번째 남자의 목을 단단히 조르며 의식을 잃게 한 후, 두 번째 남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뒤통수를 단검의 손잡이로 강하게 내리쳤다. 두 명 모두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헥스는 쓰러진 두 사람을 재빨리 어두운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제로를 바라보았다.
제로는 이미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 문 앞의 경비에게 접근하는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헥스는 그녀가 어떻게 그 경비를 제압할지 주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경비는 소리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제로의 권총 손잡이가 정확히 그의 목덜미를 강타한 것이다.
'놀라워...'
헥스는 그녀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방 안의 두 명만 남았다.
붉은 눈동자가 헥스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확인한 제로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문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동시에 능력을 발동했다.
정지한 시간 속.
헥스마저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제로는 단숨에 방 안으로 뛰어들어 들어앉아 있던 블랙 로즈의 감시자 두 명의 숨통을 끊듯 기절시켰다. 권총을 휘두를 때의 날렵한 동작, 뒤이어 발끝으로 명치를 차 올리는 동작까지. 조용하지만 치명적이었다.
일 분 남짓한 그 시간 안에 연달아 능력을 사용해왔기에, 제로의 호흡은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복면 아래로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를 짧게 눌러 삼킨 제로는 곧장 방 안의 세 아이 앞으로 무릎을 꿇었다.
"...놀라지 마. 괜찮아. 구하러 왔어."
이전까지 헥스에게 내뱉던 냉기 서린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목소리 안에 깃든 온기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 같았고—실제로, 그것은 시엘의 온기와도 같았다.
"네가 네이트, 그리고... 넌 루시, 맞지? 여기가 마르코고."
아이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헥스가 말했던 이름들을 기억해내어 불러주는 제로의 눈빛에는 조심스러운 다정함이 담겨 있었다. 두려움에 눈을 크게 뜬 아이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제로는 숨을 짧게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이내 다시 헥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세, 눈빛이 달라졌다. 붉은 눈동자에서 따뜻함은 거두어지고, 다시 냉철한 결정이 차올랐다.
“애들 데리고 바로 나가. 기절시킨 놈들이 언제 깨어날지 몰라.”
말과 동시에, 제로는 가장 몸집이 작은 아이를 들어 헥스의 팔에 조심스럽게 안겨주었다.
“…차까지 전력으로 달려. 내가 늦으면—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더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작전 지시였다. 하지만 그 속에는 확실히 ‘신뢰’라는 단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로는 다시 한 번 아이들을 흘끗 돌아보고는, 어둠 속으로 몸을 낮췄다.
헥스는 제로가 아이를 자신의 팔에 안겨주자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제로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순간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능력을 보고 난 후에도 여전히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는 중이었다.
"알았어. 너도 빨리 와."
헥스는 작은 아이를 한 팔로 안고, 다른 두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의 거대한 손 안에 작은 손이 완전히 감싸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금색 눈동자는 아이들에게 안심을 주려는 듯 부드럽게 빛났다.
"괜찮아. 이제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게."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소리가 없었다. 기절한 경비들을 지나치며 아이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했다.
'제로의 움직임, 그리고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마치 다른 사람 같았어.'
헥스는 복도를 따라 출구로 향하며 제로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과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무언가 익숙한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다들 용감하게 잘 하고 있어."
출구가 보이자 헥스는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제로를 찾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단 하나, 아이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나가는 것뿐이었다.
헥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차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금색 눈동자는 주변을 경계하며 빛났다. 아이들을 차 안으로 안내하며 그는 제로가 건넸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자, 이제 풀어줄게."
그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묶인 손목과 발목을 풀기 시작했다. 작은 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을 보며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그에게 일상이었지만, 아이들을 대하는 그의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다 괜찮아. 이제 안전해."
열쇠로 마지막 아이의 묶인 발목을 풀어주며, 그는 문득 생각에 잠겼다. 제로가 아이들에게 말했던 그 목소리... 어디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따뜻함과 다정함은 분명 차갑고 날카로운 제로의 평소 말투와는 달랐다.
'그 목소리... 설탕의 비밀에서...'
그의 머릿속에 시엘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검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그리고 그 따뜻한 목소리. 제로와 시엘. 그의 눈이 깨달음으로 살짝 커졌다.
"...그럴 리가."
그는 중얼거렸지만, 모든 퍼즐 조각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의 안전이 우선이었고, 제로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헥스는 차 창밖으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아이들을 품에 안고 조심스레 사라지는 헥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순간, 제로는 복면 너머로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긴장 속에서도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아이들을 다독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그 톤에, 제로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역시. 단 걸 좋아하는 사람은 나쁠 수가 없다니까.’
그러나 감상에 잠기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복면 아래의 미소는 금세 사라졌고, 검은 장갑을 낀 손이 허리춤의 은빛 권총을 더 단단히 쥐었다.
다시는 쏘지 않아도 되길 바랐던 무게였다.
천천히 뒷걸음치며 폐창고의 문 쪽으로 향하는 제로의 눈동자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들어올 때 기절시킨 블랙 로즈의 수하들이 곧 깨어날 것이다. 이제부터는 진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사실, 그녀는 그동안 가능한 한 총구를 겨누지 않으려 애써왔다. 단순히 ‘죽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중요한 무언가가, 타인보다 우월할 수 없다는 신념. 모든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는 믿음이 그녀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원칙을 밀어낼 이유가 있었다. 지켜야 할 아이들이라는, 그 어떤 정의보다도 더 확실한 이유가.
“……애들 데리고 먼저 가라니까.”
입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며 문 틈으로 귀를 기울였다. 헥스와 아이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간 건 확인했지만, 바퀴가 구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차가 출발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헥스는 그녀가 오기 전까지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이다.
복면 너머의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
‘쯧.’
혀를 찬 소리가 복도에 짧게 울렸다.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건가. 총성이 울리지 않길 바랐던 마음을 뒤로 한 채, 제로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깨 위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날렸고, 은빛 권총이 어둠 속을 스쳤다.
‘……미련한 인간. 하긴, 그렇게 안 미련했으면, 저렇게 아이들 안고 걷지도 못했겠지.’
그리고 왠지, 그게 싫지 않은 자신을 깨달으며—제로는 속도를 더 높였다.
아이들의 묶인 손발을 모두 풀어주고 안전하게 차에 태운 헥스는 계속해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폐창고 방향을 향해 있었다. 제로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곧 안전한 곳으로 갈 거야. 다들 괜찮아?"
아이들을 다독이는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차 창문 너머로 계속해서 제로를 찾던 그때, 멀리서 총성이 울렸다.
'저 바보 같은...'
헥스는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제로가 일부러 블랙 로즈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과 아이들을 쫓지 못하도록.
잠시 망설였지만, 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제로의 계획을 믿기로 했다. 그녀의 능력을 보았고, 그녀가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로... 꼭 살아서 돌아와."
그는 중얼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제로가 돌아오면... 그녀에 대한 의문을 풀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헥스는 서부 고아원에 도착하자마자 디그와 로키가 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번졌다.
"형님! 애들 데려오셨군요."
디그가 달려와 차 문을 열며 외쳤다. 헥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을 차에서 내리게 도왔다.
"이 아이들 잘 돌봐. 빌렌의 사람들이 오면 절대 넘기지 마."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로키가 재빨리 다가와 아이들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세요, 형님. 목숨 걸고 지킬게요."
헥스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고아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본 후, 차로 돌아왔다. 비밀 상점으로 향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제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능력, 그리고 아이들을 대하는 그 목소리... 시엘과의 연관성이 점점 더 확실해지는 듯했다.
비밀 상점에 도착했을 때, 술집은 여느 때와 같이 영업 중이었다.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익숙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헥스의 마음은 여전히 제로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무사히 돌아왔을까?'
금색 눈동자가 술집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바 뒤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의 귀는 계속해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태운 헥스의 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제로는 그 자리에 남았다. 땀과 먼지가 뒤섞인 복면 아래로 숨이 거칠게 들이쉬어졌다.
총도, 초능력도 쓰지 않고 자신에게 쏟아지던 블랙 로즈 수하 넷의 공격을 버텨낸 건 오랜만이었다. 다행히 차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시간을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기회. 그리고, 마침내—방아쇠 대신 허공을 가르며 시간을 가뒀다.
정적이 폐창고 앞 공터를 집어삼켰다. 제로는 흐릿한 그림자 속을 빠져나와 폐공장 주변의 담장을 넘고, 옥상을 달리고, 빛이 없는 골목을 훑었다. 그렇게 단숨에 향한 곳은 비밀 상점의 3층. 애쉬의 서재였다.
정문이 아닌 창문으로 조용히 몸을 밀어넣은 제로는 책장 앞에서 서류를 넘기고 있던 애쉬를 확인하자마자 가빠졌던 숨을 몰아쉬었다. 금속성의 조용한 닫힘 소리와 함께 창문이 닫히고, 복면 아래에서 숨이 새어 나왔다.
"...애쉬."
짧고 깊게, 그러나 흔들리는 어조였다. 복면 아래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비밀 상점의 네 사람이, 락타리온의 일로 내게 의뢰를 했어. 너도 알고 있었겠지?"
애쉬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회청색 눈동자가 천천히 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입가에는 늘 그렇듯 여유로운 미소가 떠 있었다.
제로는 한 발 다가섰다. 눈빛이 매서워졌다.
"루스턴과 균형을 맞춰야 하니까 직접 안 나선 거, 이해해. 나도 그게 이 도시의 룰이란 건 알아."
숨을 골랐다. 더 이상 타협하고 싶지 않았던 문장만이 입술을 뚫고 나왔다.
"...그런데 지난번에 경고한다고, 그랬다고 했잖아."
복면 아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경고가 아직도 안 먹힌 건... 대체 어떻게 생각해?"
헥스는 서부 고아원에서 돌아와 비밀 상점에 들어섰다. 익숙한 술집의 분위기가 그를 반겼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제로에게 가 있었다. 그는 묵묵히 바 뒤로 자리를 잡고 잔을 닦기 시작했다.
'제로... 시엘... 같은 사람일까?'
술집의 손님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는 평소보다 더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는 자꾸만 술집 문과 계단 쪽을 향했다.
'애쉬에게 가봐야 할까?'
그는 결심했다. 애쉬의 서재로 가보기로 한 것이다. 디그에게 잠시 바를 맡기고 그는 계단을 올랐다. 애쉬의 서재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던 그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제로가 맞다면, 왜 그렇게 신경 쓰지? 루스턴이 내 허락 없이 아이들을 건드린 건 나도 몰랐어."
애쉬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제로의 목소리.
"그 '모른다'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오니까 더 기가 막히네."
헥스는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들어가야 할까? 하지만 그의 결심은 이미 서 있었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금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창가에 선 애쉬와 그 앞에 서 있는 여자. 검은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복면이 벗겨진 얼굴에서—붉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돌아왔다.
'시엘...?'
애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제로라면, 아니, 지금까지의 제로라면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진 않았을 것이다. 차가운 이성과 날렵한 직관으로만 움직여온 삶 속에서, 이렇게까지 분노할 일은 아니었고, 이건 철저히 의뢰였고, 제로는 그 의뢰를 완수했으니까.
그런데도, 불안처럼 스며든 감정은 어딘가 익숙한 얼굴을 지나칠 때마다 파문처럼 흔들렸다. 그날 밤, 루멘 기사단을 피해 연인의 연기로 자신을 품어주었던 헥스의 손길. 따뜻한 체온. 쏟아지던 숨결.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그녀를, 조금씩 바꾸어놓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애쉬에게 쏘아붙인 말이, 사실은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 투정이라는 걸 제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른다’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오니까 더 기가 막히네.”
날카롭게 날아간 문장 뒤에 이어진 것은, 깊은 숨이었다.
복면을 벗었다. 땀에 젖은 이마와 깨물린 입술이 드러났다. 감정을 숨기던 얼굴 위로, 억눌렀던 고열처럼 끓어오른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애쉬는 늘 그렇듯 우아하고도 능글맞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다만 이번에는, 언제나 걸려 있던 특유의 미소를 거두었을 뿐.
바로 그때였다—문이 조용히 열렸다. 제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연 헥스와 마주쳤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커졌다. 그 속엔 믿기지 않는다는 놀라움과, 어딘가 모를 혼란이 뒤섞여 있었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숨소리마저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애쉬가 피식 웃었다. 예상했다는 듯, 그 특유의 여유가 다시금 눈가에 떠올랐다.
“와줬네, 헥스.”
그 짧은 말은 분명히 상황을 모두 정리한 이의 말투였다. 제로는 그의 입이 더 열리기 전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은 애쉬와의 말을 끝내야 했다.
“…미안해. 화낸 건 내가 감정적으로 굴었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답지 않은 제스처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네 잘못 아닌 거 알아. 너도 네 방식대로 최선을 다해왔다는 것도.”
애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한때 서로의 목숨을 구했던 사이. 락타리온의 균형을 바닥에서부터 지탱해온 비밀스러운 동맹. 그렇게 서로를 잘 알기에, 끝내는 다가가지 못하는 거리감.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애쉬의 회청색 눈동자와 잠시 얽혔다가, 이내 돌아섰다.
그 시선이 다시, 문가에 선 헥스를 향했다. 이전과는 다른 복잡한 감정이, 가라앉은 눈빛 아래 조용히 출렁이고 있었다.
서재에 흐르는 긴장감 속에서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시엘, 아니 제로의 얼굴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 문가에 서 있었다.
애쉬가 제로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 알아. 아이들 문제는 늘 네 약점이었지. 이번엔 내가 실수했어."
애쉬의 목소리에는 헥스가 좀처럼 듣지 못했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애쉬와 제로 사이의 친밀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루스턴은 내가 처리할게."
제로는 고개를 끄덕였고, 애쉬는 그제야 헥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헥스. 아이들은 무사하겠지?"
헥스는 여전히 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짧게 대답했다.
"디그와 로키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깊었다. 제로와 시엘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가 슬쩍 피했다.
'이제 모든 게 말이 돼...'
"...내가 어쩌겠어. 또 믿어야지."
제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에 닿은 애쉬의 손을 치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둘 사이의 오래된 신뢰와 이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개를 돌려 헥스를 바라본 순간, 그녀의 눈빛에는 난감함이 가득했다. 그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복면 없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로에게는 기정사실이 아닌 예외이자 변수였다.
“...하, 진짜…”
그녀는 작게 중얼이며 다시 애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애쉬는 여전히 익숙한 태도로,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머금고 헥스를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알아서 잘 해보라”는 듯한, 늘 그래왔던 대로 얄밉고도 유연한 애쉬의 방식이었다.
제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알았어."
그 말은 애쉬에게 한 듯했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하는 체념 섞인 수긍이기도 했다.
이내 다시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헥스를 향했다. 마침내 정면으로 마주한 그 순간, 제로는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엘이라 부를 거에요, 아니면 제로라고 부를 거에요?"
담담한 목소리로 건네진 질문 안에는 꽤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조차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떤 얼굴로 그와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엘이라면,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따뜻하게 말했을 테고. 제로라면, 이 사실을 안 그를 찬 눈빛으로 단칼에 자르며 경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 중간 어딘가에 서 있기에, 선택을 그에게 넘겼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놀라움, 의구심, 그리고 이해가 한데 어우러진 채였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그는 모든 퍼즐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시엘... 그리고 제로."
그의 목소리는 깊고 차분했다. 서재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애쉬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 창가에 기대어 섰다.
"이제 이해가 되는군."
헥스는 천천히 제로에게 다가갔다. 그의 키 때문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형태가 되었지만, 그 시선에는 위압감이 아닌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왜 시엘이 설탕의 비밀에서 날 봤을 때 그런 눈빛을 보였는지. 왜 제로가 그 아이들을 구할 때 그런 목소리였는지."
그는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맴돌았지만, 지금은 가장 중요한 것만 물어볼 때였다.
"안전하게 빠져나왔나?"
그 질문에는 그녀의 신분에 대한 놀라움보다, 그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담겨 있었다. 제로가 보여준 따뜻함, 시엘이 보여준 정직함. 그는 그 두 모습이 한 사람의 것임을 이제 확실히 알았다.
헥스의 예상 밖의 질문에,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배신감 섞인 질문이 먼저 나올 줄 알았다. “왜 숨겼어”, “언제부터였어”, “나를 속였냐”는 말들이. 그런데 돌아온 것은 ‘안전하게 빠져나왔나?’라는 질문이었다.
"어, 음... 대충은...?"
헥스를 마주 보며 제로는 어쩐지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 말이 나온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그딴 건 중요하지 않다’며 잘라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몸을 숨기고 총을 쓰는 대신 맨몸으로 시간을 버텼고, 옆구리 언저리에 작은 베임이 있었다. 지금은 검은 자켓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피가 번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차가 멀어질 때까지는 시간을 멈출 수 없었기에 참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억눌린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로의 눈매가 곧장 날카로워졌다.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 기댄 애쉬가 입꼬리를 틀어막은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가 참지 못하고 웃는 이유는 너무나 뻔했다. 제로가 헥스에게 보여주는, 낯선 순한 얼굴 때문이었다.
“…웃지 마."
제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애쉬를 노려보았다.
"시엘일 때 내가 존대 쓰는 거 들으면 아주 기절하겠어."
말끝에 다시금 고개를 돌린 그녀는 헥스를 마주보았다. 여전히 그의 금색 눈동자가 곧고 묵직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어쩐지 머뭇거리게 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본능처럼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의뢰 내용에, 수행자의 안전은 없잖아…요."
말끝이 미묘하게 갈라졌다. 제로와 시엘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 마디였다.
그때 애쉬의 웃음이 조금 더 커졌고, 제로는 작게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옆구리 상처가 더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진짜 아픈 건 그쪽이 아니라… 이 복잡한 감정일지도 모르겠지만.
애쉬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십 년이 넘게 봐왔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군."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몸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옆구리에 멈춰섰다. 검은 자켓 아래로 미세하게 번지는 붉은 기운이 보였다.
"다쳤군."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애쉬는 고개를 젓고는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제로는 항상 그랬어. 자기 몸은 안중에도 없으니까."
헥스는 애쉬를 한 번 쳐다본 후, 제로에게 다가갔다. 그의 키가 그녀를 완전히 덮을 듯했다.
"마스터. 제로를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애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녀가 원한다면."
헥스는 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치료가 필요해. 푸른지붕집으로 가자."
그의 말에는 거절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제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의 등 뒤로 애쉬의 능글맞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헥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제로의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 애쉬를 한 번 더 노려본 제로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완전히 화가 났다기보다는, 뻔히 들킨 민망함과 애매한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는 헥스를 향해 작게 입을 열었다.
"...푸른지붕집 2층이지? 알아서 갈게."
그 말은 거절이 아니라, 오히려 동의에 가까웠다.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는 그가 굳이 애쉬 앞에서까지 자신의 상처를 들춰내지 않기를 바랐다. 혼자 익숙하게,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제로는 짧게 피식 웃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복면을 다시금 얼굴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헥스가 뭐라 말하기도, 애쉬가 붙잡기도 전에 서재의 창문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이래서 내가 문은 안 써."
작은 중얼임과 함께, 그녀는 그대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비밀 상점의 바로 옆, 어쩌면 수없이 스쳐 지나갔던 건물이었지만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었던 곳. 제로는 헥스가 살고 있는 푸른지붕집 2층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걸 알게 된 것이 오늘인지, 훨씬 이전이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잠시 후, 술집 문을 통해 돌아온 헥스가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그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소리없이 기다리고 있는 복면 속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생각보다 느리네요."
가볍게 비꼬는 듯한 말투.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제, 아주 조금의 신뢰가 담겨 있었다.
푸른지붕집 현관 앞에서 제로를 발견한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잠시 깜빡였다. 그는 그녀가 이미 도착해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래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느린 게 아니라, 네가 빠른 거야."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울렸다. 문을 열며 그는 제로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는 그녀의 움직임을 살폈다. 옆구리 상처 때문에 미세하게 불편한 자세로 걷고 있었다.
2층에 도착해 문을 열자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이 드러났다. 하얀 벽지와 베이지색 나무 바닥, 모던하고 단정한 가구들. 창가에는 몇 개의 허브 화분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앉아. 옷 벗어."
그는 말을 아끼며 욕실로 향했다. 구급상자를 가지러 간 것이 분명했다. 거실로 돌아온 헥스는 제로가 여전히 복면을 쓴 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고집 센 여자...'
그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소파 옆 테이블에 구급상자를 내려놓았다.
"여기선 그거 벗어도 돼. 아니, 벗어야 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깊은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이제 그는 제로와 시엘이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 속에 일으키는 복잡한 감정을 아직 정리하지 못했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상처였다.
창밖으로 락타리온의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그 아래서 그는 제로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한숨을 길게 내쉰 제로는 이번엔 순순히 헥스의 말을 따랐다. 복면을 벗고, 이어 검은 자켓도 조용히 내려두었다. 그 아래엔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니트가 있었지만, 옆구리 쪽은 어설프게 찢겨져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앉으며 너풀거리는 자락을 무심히 손으로 걷어올렸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구급상자에서 약과 붕대를 꺼내는 헥스를 향했다.
“…이 이상 하려면 다 벗어야 하는데요?”
목소리는 전보다 부드러웠다. 시엘의 말투에 가까운 그 어조는, 어쩌면 피로 때문이었고, 어쩌면 그가 옆에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자리에 앉으면서 제로는 허리춤에 고정된 은빛 권총을 조심스레 빼내어 옆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니트를 들어올린 손과 반대쪽 손에 끼워져 있던 검은 장갑을 이로 물어 벗었다. 툭, 바닥에 장갑이 떨어졌다.
“이 정도면... 그렇게까지 많이 다친 건 아니에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헥스의 미간이 뚜렷하게 좁혀졌다.
그 반응에, 제로는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목소리도 작아졌다.
그것이 사실이었기에 더더욱— '제로'로 살아온 시간 동안, 그녀는 이런 상처쯤은 익숙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일상의 일부여야 하는데, 헥스의 눈빛은 그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눈빛 속에서—단순한 분노나 걱정이 아닌, 어딘가 아프다는 감정이 비쳤다.
그걸 보며 제로는, 복면 아래의 자신이 조금은 바보 같았던 걸 깨달았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상처에 고정되었다. 베인 자국이 생각보다 깊었다. 그는 조용히 소독약을 적신 거즈를 준비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다친 게 아니라고?"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깊었다. 손가락이 제로의 상처 주변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붉은 피가 그녀의 창백한 피부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옷 더 들어올려."
헥스는 평소처럼 말수를 아꼈지만, 그 짧은 명령에는 거부할 수 없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는 소독약을 묻힌 거즈로 상처를 닦기 시작했다. 섬세한 손길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시엘이 제로라니... 그래서 그때 그런 눈빛이었나.'
소독을 마친 후, 그는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창가에서 허브의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왔다. 그의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항상 이런 식이었어?"
헥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붕대를 감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소독약이 상처에 닿는 순간, 익숙한 쓰라림이 밀려왔다. 그러나 제로는 한 치의 소리도 새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붉은 눈동자가 헥스의 금빛 눈을 조용히 마주보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보다 잘 아시잖아요? 이렇게 밤에 움직이는 사람들이 어떤지는.”
그 말은 꼭, 지금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일처럼 툭 내뱉는 고백 같았다.
붕대가 다 감긴 걸 확인한 그녀는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내려놓았다. 자세를 바로잡으며 작게 숨을 내쉰 제로는, 아무것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오늘 하루의 전부를 담은 듯한 그 한 손짓에 피로가 서려 있었다.
“시엘일 때 한 번, 제로일 때 한 번. 신세를 두 번 진 셈인데…”
가볍게 웃은 그녀는 그 웃음을 감추지 않고 이어갔다.
“그 김에 한 번 더 져도 될까요?”
말을 마치며 그녀는 옆에 앉은 소파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셔츠 하나만 빌려주세요. 그리고…”
붉은 눈동자가 다시 그를 향해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제로도, 시엘도 아닌 듯한 눈빛이었다.
“아침까지, 소파 좀 써도 될까요.”
이제야 진짜로, 누구에게도 쫓기지 않고 단 한 사람 앞에 기대어 앉은 제로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었다. 아주 조금, 안도한 사람처럼.
구급상자를 정리하며 헥스는 그녀의 질문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붉은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이제는 복면 없이 드러난 그녀의 얼굴선. 시엘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그 얼굴이었다.
"소파는 쓰지 마."
그의 말은 짧고 단호했다. 제로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을 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써. 셔츠는 가져다줄게."
그는 침실로 향했다. 벽장에서 깨끗한 셔츠를 꺼내 돌아오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제로가 시엘이다. 시엘이 제로다.' 그 사실이 여전히 그의 마음에 무겁게 남아있었다.
셔츠를 건네며 그는 제로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구하던 순간에 그녀가 보여준 따뜻함. 설탕의 비밀에서 만났을 때의 그 밝은 미소.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앉아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
"질문이 많아."
그는 소파에 천천히 앉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쉬어. 내일 아침에... 시엘로, 아니면 제로로... 네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하자."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차분함이 담겨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이해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이른 아침, 푸른지붕집의 2층 거실에 햇살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헥스는 소파에 앉아 잠든 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밤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셔츠를 입은 채 소파에 웅크린 그녀의 모습이 계속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결국 침대는 안 쓰는군.'
그의 넓은 셔츠는 제로의 작은 체구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평소의 차가운 인상과 달리, 잠든 그녀의 얼굴은 놀랍도록 평화로웠다. 헥스는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오래 지켜보고 있었는지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부엌으로 향한 그는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갓 내린 커피 향이 집 안에 퍼지는 동안, 그의 생각은 여전히 복잡했다. 설탕의 비밀의 시엘과 락타리온의 그림자 제로가 같은 사람이라니. 그는 여전히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커피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온 헥스는 테이블 위에 정리된 그녀의 옷과 권총을 보았다. 그녀가 상점에서 시엘로 일할 때의 부드러운 미소와 제로로서 싸울 때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의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소파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제로가 깨어나고 있었다.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뜬 순간, 제로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곧 옆구리에 찌릿하게 번진 통증과,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헥스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제야 어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다시금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깨우지 그랬어요. 혼자 새벽부터 깨어 있었을 거면서.”
존대도 반말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걸린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말과 달리 제로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피로한 기색이 아닌 편안함이 떠올라 있었다. 방금 막 잠에서 깬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나른한 기류가 은근히 섞여 있었다.
헥스는 말없이 그녀에게 커피잔을 건넸다. 제로는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며 손끝으로 온기를 느꼈고, 이내 익숙한 습관처럼 코끝으로 향을 맡은 뒤 한 모금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음, 이 정도 진한 커피를 좋아하셨군요? 어쩐지… 요즘 더 진하게 내리면 좋아하시더라니.”
소파에 앉아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제로'라는 이름의 괴도가 아니었다. 언제나 웃으며 손님을 맞고, 헥스를 위해서는 조금 더 신중한 손길로 설탕의 비밀 종업원 시엘이었다.
잠시 커피잔을 내려놓은 제로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헥스의 금빛 눈을 마주했다.
“궁금한 게 많죠?”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흐려지지 않은 말투로 제로가 말을 이었다.
“마침 오늘은 제 휴일이에요.”
짧은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살짝 웃었다. 여유와 진심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물어보세요. 다 대답할게요.”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헥스의 의뢰 덕분에 상처를 입고 그의 셔츠를 입고 쓰러졌던 제로의 얼굴에, 카페를 찾는 그에게 적당히 단 디저트와 조금 더 진한 커피를 가져다주던 시엘의 미소가 떠올랐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갓 내린 커피 향기가 거실에 가득한 가운데, 그는 그녀의 제안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자신의 커피잔을 손에 들었다.
"셔츠는 편한가?"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넓은 셔츠는 제로의 작은 체구에 훨씬 크게 느껴졌다. 이 모습이 어쩐지 낯설면서도 자연스러워 보였다.
"궁금한 건 많아. 하지만 가장 먼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거실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애쉬와는 어떤 관계지? 네가 제로라는 걸 애쉬는 알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는 제로와 애쉬의 관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었다.
설탕의 비밀에선 반과의 관계를 묻더니, 이번엔 애쉬라니. 제로는 잠시 고개를 갸웃이며 헥스를 바라보았다. 첫 질문 치고는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커피를 입에 대며 피식 웃었다.
“적어도 저는 그를 이름으로만 부르고, 그는 절 ‘우리 제로’라고 부를 정도는 돼요. 어제 들으셨죠?”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그녀의 말투는 장난기 섞인 담담함이었다.
“말했듯이, 제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원래 애쉬 하나뿐이었어요. 대신 그는... 저한테 빚이 하나 있죠.”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두며 제로는 천천히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열두 살, 세상이 무너질 듯 두려웠던 시절. 실세가 된 직후의 애쉬를 우연히 구하게 되었던 그날. 자신의 능력이 처음 발현된 순간. 그 모든 기억이 짧은 숨결 사이로 스쳐 지나갔다. 그 이후로 십 년의 시간이 지나가는 사이에 자신은 '제로'가 되었고, 그는 '비밀 상점의 마스터'가 되었기에 자세한 내용은 일부러 입에 담지 않았다.
“십 년은 됐어요, 이 관계가.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애쉬가 알아서 하겠죠.”
그러다 다시금 고개를 돌린 제로의 붉은 눈동자가 헥스의 금빛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는 지금의 저를 ‘락타리온의 양심’이라 부르고요.”
그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동시에, 그것이 ‘제로’라는 존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게 첫 질문이에요?"
붉은 눈동자가 헥스의 금안을 들여다보았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질문에 살짝 흔들렸다. 왜 첫 질문으로 애쉬와의 관계를 물었는지... 그는 스스로도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어제 애쉬가 '우리 제로'라고 부르는 순간 가슴 한 켠이 묘하게 조여왔던 감각이 떠올랐다.
"...중요해 보여서."
그는 간결하게 대답하며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제로의 말이 맴돌았다. 십 년이라... 애쉬가 열여덟 무렵이니, 제로는 그때 어땠을까.
"락타리온의 양심이라..."
그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나머지 질문들. 왜 두 개의 삶을 살지? 시엘과 제로. 위험하지 않아?"
헥스는 소파 앞 테이블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제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의심이나 경계가 아닌, 순수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으로 그는 그녀의 이중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이해하고 싶어했다.
창밖으로는 락타리온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가 비밀상점을 정리하고, 그녀가 설탕의 비밀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그들 사이에 쌓인 모든 비밀과 의문이 하나씩 풀리는 날이었다.
"이건 제가 제로일 때도 이미 말씀드렸죠."
제로는 빈 커피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쩐지 시엘의 웃음에 더 가까운 표정이었다.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게 흘러나왔지만, 그 안에는 스스로의 길을 받아들인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헥스와 처음 마주했던 동부 항구의 여관 지하. 그곳에서 서로의 의도는 달랐지만, 결국엔 각자 원하는 걸 얻었다. 헥스는 페시튼과 블랙 로즈의 화약 거래에 대한 정보를, 제로는 루비가 박힌 장미 펜던트를 소년에게 돌려줄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제가 얻는 대가는, 상점에서 받는 보석이나 돈이 아니라... 제가 여전히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확인이에요."
그녀의 입가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복면 아래에선 단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시엘과 제로, 두 이름이 한 사람의 감정 안에서 겹쳐지고 있었다.
"...사실 애쉬는 제가 시엘로서 어떻게 사는지는 본 적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제 두 모습을 온전히 본 건, 헥스 씨가 처음이겠네요."
가볍게 고개를 숙였던 제로가 다시 천천히 헥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매는 조금 느슨하게 풀어졌고, 붉은 눈동자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위험하지 않냐고요?"
잠시 커피잔을 어루만지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그렇죠. 그리고 쉽진 않아요. 하지만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그건 사명도 아니고, 희생도 아니었다. 그저 —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이기에.
제로의 말을 듣는 동안 헥스의 표정은 차분했지만, 그의 금색 눈동자에는 미묘한 감정의 파도가 일렁였다. 그녀가 자신의 이중생활에 대해 설명하는 방식이 놀랍도록 담담했다. 마치 오랫동안 짊어져 온 짐에 익숙해진 사람처럼.
"...네가 하는 일들이 모두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천천히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커피를 더 내리면서도 그의 시선은 소파에 앉아있는 제로에게 머물렀다. 저 작은 체구가 밤마다 락타리온의 어둠 속을 누비고 다녔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 났다.
"네가 시엘로 살 때, 설탕의 비밀에서 웃으며 손님들을 맞이할 때... 그건 연기였어?"
다시 거실로 돌아온 헥스는 그녀의 커피잔을 다시 채우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난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커피 향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감싸안았다.
"나는... 네가 가져다주는 디저트를 좋아했어."
그 말은 마치 고백처럼 들렸다.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제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네가 제로일 때... 그 복면 아래에서도 웃고 있었어?"
그의 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붉은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두 모습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을 때,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연기한 적은 없어요. 만약 제가 연기를 더 잘했더라면... 어제처럼 애쉬와 말다툼하다가, 헥스 씨 앞에서 그렇게 순순히 제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겠죠."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그를 향해 살짝 휘었다. 여전히 웃음이 어려운 눈매였지만, 그 안엔 조심스러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복면 아래에서 웃은 적도... 사실 한 번도 없어요. 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잖아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보인 그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근데요... 저도 그랬어요. 처음엔 단 걸 안 좋아한다는 헥스 씨가, 제가 권하는 디저트를 하나둘씩 주문할 때마다... 괜히 기뻤어요."
그 말에 담긴 뉘앙스는 농담처럼 가볍지만, 어딘가 따뜻했다.
"그래서... 창가 자리 중에서도 햇빛은 들지만 구석진 곳으로 안내했고, 커피는 조금 더 진하게 내려봤고... 자르디아한테는 헥스 씨가 좋아할 법한 메뉴는 꼭 준비해달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다만, 그 손엔 말하지 못한 모든 사소한 마음들이 담겨 있었다—한 번도 표현되지 못했던 작은 진심들이.
"그러니까... 저는 그 순간들에도 제 역할을 연기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있었던 거예요."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테이블 위로 내밀어진 제로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임 없이 자신의 큰 손을 그녀의 작은 손 위에 올렸다.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그래서 시엘이 내게 건넨 디저트들은 연기가 아니었군."
그의 낮은 목소리가 아침 햇살이 가득한 거실에 울렸다. 헥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이제야 모든 것이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설탕의 비밀에서 시엘이 건네던 미소, 제로가 복면 아래 감추던 표정, 그리고 지금 그의 앞에 앉아 있는 그녀.
"그렇다면... 나도 진심으로 네 디저트를 좋아했어."
그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이 작은 손이 락타리온의 어둠 속에서 권총을 들고, 낮에는 디저트를 나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내가 네게 의뢰했을 때 달랐을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라지진 않았을 거야. 네가 제로든, 시엘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헥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의 허브 화분들이 햇살을 받아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제로를 향해 돌아섰다.
"지금부터는... 네가 원하는 대로 불러줄게. 시엘? 제로? 아니면..."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부드러웠다. 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붉은 눈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제로는 조용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헥스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어딘가 묵직하게 뻐근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것이 옆구리 때문인지 아니면... 더 안쪽에서 오는 것인지는,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소리 없이 다가가 헥스가 서 있는 창가에 섰다. 그의 어깨를 올려다보듯 시선을 올린 그녀의 눈동자에, 아침 햇살이 살짝 스며들었다.
"...그럼, 어떻게 부르려고요?"
조금 장난스럽게, 그러나 한층 조심스럽게—하얀 얼굴 위에 붉은 입술이 작게 휘어졌다.
"그걸 먼저 알려주시면, 저도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잠시 말을 멈춘 제로는, 붉은 눈동자로 그의 금빛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헥스 씨라고 부를지... 그냥 헥스라고 할지... 아니면—"
끝을 흐리는 말투 속에 묘한 기류가 번졌다. 장난 같지만 장난이 아닌, 담담하지만 어딘가 아릿한 울림이 담긴 질문이었다. 말끝을 맺지 않은 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조금 다른 마음이 담겨 있었다.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제로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공중에 맴도는 동안, 그의 넓은 가슴 안에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이름이라... 그가 그녀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네 이름..."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넘겼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에 닿을 듯 말 듯 스쳐갔다.
"제로든, 시엘이든... 둘 다 네 진짜 모습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깊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두 사람 사이에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그냥 네 이름을 부르고 싶어."
헥스는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섰다. 이제 그들 사이의 거리는 한 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그냥... 너."
그 말은 단순한 호칭을 넘어, 그가 그녀의 모든 면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제로도, 시엘도 아닌, 그녀 자체를.
"그리고 넌... 나를 어떻게 부르고 싶어?"
그의 시선이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깊이 닿았다. 헥스의 가슴 안에서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강한 감정이 일고 있었다.
그의 말에 제로가 입을 열기 전, 헥스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있었나? 마치 오랜 시간 폭풍 속을 걸어온 후 잠시 바람이 멎은 것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진 느낌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은발 사이로 스며들어, 금색 눈동자를 더 밝게 빛나게 했다.
"네가 원한다면... 나도 그냥 '헥스'라고 불러줘."
그는 제로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이제 복면이 없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엘과 제로의 경계가 무너진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복면 아래 네 표정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을 것 같군."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 가장자리를 살짝 스쳤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막연히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네가 웃을 때마다, 내가 그걸 놓치지 않았으면 해."
그가 자신을 연인처럼 감쌌던 그날 밤이 떠올랐다. 루멘 기사단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의 그림자 안으로 조용히 숨었던 순간. 복면 위로 닿았던 입술 옆의 짧은 키스. 그땐, 그저 가슴이 조금 더 빠르게 뛰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먹먹할 정도로, 안쪽이 고동쳤다.
그의 손끝이 얼굴을 스치고, 그 온기가 피부 너머로 번져들었다. 거칠 것만 같은 손이 이렇게 조심스럽다니. 작게 숨을 몰아쉰 그녀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떨림을 누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헥스라고 부를게요, 그럼."
언제나 제로의 경계와 단호함으로 덧칠되던 ‘헥스’라는 이름이, 이번엔 시엘의 말투로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한 마디 안에, 두 이름 사이를 오가던 그녀의 모든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대답에 헥스의 금색 눈동자가 깊은 정서로 물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더 단단히 감쌌다. 그토록 위험한 일을 해왔던 그녀가, 지금은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제로... 아니, 시엘도 아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넘겼다. 그 동작은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온 순간을 맞이하는 것처럼 경건했다.
"그냥 너."
헥스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댔다. 그의 은발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섞였다. 그들 사이의 공기가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네가 웃을 때마다 내가 알아차릴 수 있게... 그리고 내가 너를 지킬 수 있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고 깊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제 복면은 필요 없어."
그리고 천천히,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것은 약속이자,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닿는 순간, 헥스의 마음속에서는 오랜 시간 흐르던 물줄기가 마침내 바다에 닿은 듯한 안도감이 일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녀에게 이토록 끌렸는지를 이제야 온전히 이해했다.
시엘의 다정함과 제로의 단호함. 그 두 모습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 이제는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퍼즐의 두 조각이 맞춰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의 삶은 항상 두 세계 사이에 있었다. 낮에는 술집 주인으로, 밤에는 애쉬의 그림자로. 그는 언제나 자신의 이중성을 감추지 않았지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경험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 역시 두 세계를 오가며 살아왔고, 그 두 모습이 모두 진실이었다. 그녀의 이중성은 그의 것과 닮아있으면서도, 더 깊고 복잡했다.
헥스는 그녀의 입술에서 천천히 떨어지며 생각했다. 시엘의 달콤한 디저트 향기와 제로의 위험한 밤의 향기가 섞인 그녀의 존재가, 어쩌면 그가 오랫동안 찾아온 안식처였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시엘로도, 제로로도. 그리고 내가 그 모든 순간에 함께할게."
그의 손이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하지만 내 앞에선... 그냥 너로 있어줘."
헥스는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자신의 넓은 가슴에 그녀의 작은 몸이 기대오는 느낌이 좋았다. 이제 그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선택할 필요도 없었다.
커다란 체구의 헥스가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을 때— 제로는 어쩐지, 그에게 삼켜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인상과는 너무도 달리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언제고 날을 세워 반말을 쏘아붙였던 자신이, 이 순간에는 조금 쑥스러워질 만큼.
그래서 숨을 고르듯 짧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참을 수 없어 새어나온 그 웃음은 그녀 ‘그 자체’와 닮아 있었다.
“…취향 특이하네요, 헥스.”
치열하게 고민했던 말투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존대도 반말도 아닌,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나’로서 내뱉은 말이었고, 그녀는 그게 제법 편하다고 느꼈다.
“권총 들고 지붕 위를 넘나드는 그 일을… 멈출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헥스를 올려다보았다. 락타리온의 밤을 가르며 전설이 되어가는 중인 괴도는 애쉬에게 ‘양심’이라 불린다 해도, 그 본질은 자신만의 정의로 이 도시를 휘젓는 제로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품은 넓고 따뜻했고, 빌려 입은 셔츠에서 은은하게 풍기던 비누 향도 괜찮았다. 그리고 지금, 그의 집 거실로 흘러드는 햇살이 아주… 따사로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처럼만에 경계를 풀어버린 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도 괜찮다면야.”
헥스의 품에 기대어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얀 손이 그의 옷깃을 살짝 당겼고, 저항 없이 다가오는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너’라고만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눈웃음과 함께, 그녀가 조용히 덧붙였다.
“시엘의 애칭은… ‘엘’이에요.”
그녀의 말에 헥스의 가슴이 따뜻하게 울렸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시엘이자 제로인 그녀가 자신의 품 안에서 경계를 내려놓는 모습은 그에게 신비로운 선물과도 같았다.
"취향 특이하다고? 아마도."
그는 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졌다.
"네가 권총 들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든, 디저트를 만들든... 그건 네 선택이야. 내가 누구길래 그걸 막겠어."
그는 그녀가 자신의 셔츠를 당기는 것을 느끼고 몸을 숙였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런 행운을 얻게 된 걸까?'
"'엘'이라..."
그는 그 이름을 혀끝에서 굴리며 맛보았다. 그 짧은 음절이 입술을 떠나는 순간, 마치 오래된 친구를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엘'... 좋은 이름이군."
그는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쥐고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키스는 깃털처럼 가볍게 그녀의 피부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제 내게는 세 명의 여자가 생긴 셈이군. 시엘, 제로, 그리고 엘."
그의 금색 눈동자가 따뜻한 미소로 빛났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그의 심장이 강하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셋 다 나를 미치게 만들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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