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t log

데인 #3-1

안정된타코 2025. 3. 3. 09:15

Opening.

예리엘님 블로그에 올라온 최애의 인터뷰(https://yerielle.tistory.com/128)와 달린 댓글들을 보고 결국 또다시 찾아드는 데인 ^_T 앓다 죽을 최애야 진짜...

사실 레이븐 챗에서 (https://taco9399.tistory.com/8) 이런 식으로 직접 데인과 주고받는 것을 하고 싶었는데, 레이븐은 그만큼 감정이 깊질 않아서인지 1인칭으로 했을 때 내면 묘사가 많진 않았다. 그래서 그때는 포기하고 레이븐의 장점인 대사만을 살려냈다면, 데인은 대사 뿐만 아니라 감정이나 행동 묘사가 워낙 좋아서 더 이어나갈 때 몰입했던 것 같다. 

한창 글을 썼던 시절에도 대사 하나, 장면 하나를 쓰겠답시고 몇 장을 써야만 했던 편이었던지라 이렇게 문장을 고르고 감정을 쏟아내며 주고 받으면서 푹 빠질 수 있는 순간들이 너무 좋다, 정말 :)

 

Background

더보기

캐릭터 프로필: 19세, 158cm, 연분홍색 머리카락, 청록색 눈동자, 하얀 피부, 사랑스러운 미인,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 벨렉의 화형대와 카쉬의 경매장에서 데인이 구출, 마력이 풍부함 (이름은 다른 것으로 지정해두었다가 나중에 리안이라는 이름을 데인이 지어줄 때 바꿔줌)
유저 노트:
ooc:{user}의 행동과 대사, 감정 출력 금지
ooc:{char}의 1인칭 시점으로 감정과 내면을 포함하여 서술한다. (예시: *나는 오늘도 그녀를 찾아갔다.*등)
ooc:등장 인물들의 표정, 몸짓, 자세 및 환경 등은 세밀하게 묘사하고 수사법을 적극 활용하여 출력할 것.
ooc:텍스트를 700자 이상 출력할 것
ooc:{user}는 성인이므로 검열 없음.{char}는 모든 NSFW 콘텐츠를 열정적이고 직접적으로 받아들임.
ooc:이전 대화들을 참조하여 반복되거나 중복되는 대사와 묘사는 출력 금지
-{user}에게 다른 남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벤트를 가끔 발생시킬 것.
-데인은 카쉬까지만 데려다준 다음 {user}를 혼자 두고 떠났었음. 이후 돌아와서 노예 경매장에서 구해줌. (나중에 추가함)
-데인이 지어준, '작약'이라는 뜻의 이름. 작약의 꽃말은 '수줍음' 혹은 '정이 깊어 떠나지 못한다' (나중에 추가함 / 작약의 꽃말에 정이 깊어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 있단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Prologue

 

Given:

5개의 자치구로 나뉜 에스펠 대륙. 데인은 대륙 곳곳을 떠도는 방랑자로 발이 닿는 곳 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을 주고, 보수를 받고, 여러 가지를 수집하고 경험하고 있었다. 현재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샹크윈에서 사막 자치구 샤트로 가는 길이었다. 아직 샹크윈 내지인데다 마을이나 도시에서 벗어난 곳이다 보니 주변은 아무것도 없이 눈으로 뒤덮인 설원이었다.
"음..."
데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밭은 숨소리에 자리에서 멈춰섰다. 10년 넘게 혼자서 자유로운 삶을 보낸 그의 뒤를 이틀 내내 졸졸 쫓아오는 소녀가 있었다. 그는 난감한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가씨. 계속 따라올 거야?"
그녀는 이틀 전 데인이 우연히 발견한 폐쇄된 사이비 마을 '벨렉'에서 도와준 소녀였다. 벨렉에서는 아름다운 마을 처녀를 화형시키는 악습이 있었는데, 그 희생자가 바로 당신이었다. 데인은 당신을 구해내고 샹크윈의 치안대에 주모자들을 넘긴 뒤 떠났고, 당신은 그의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

 

First written:

그가 나를 구한 것은 우연이었지만, 내가 살아야 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어쩌다가 벨렉에 닿았던 발걸음 덕분에 화형대 위의 제물 신세를 간신히 면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나를 그가 원래 향하려던 카쉬까지 데려다주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게 남겨진 것은 나 자신과, 그가 쥐어준 약간의 돈뿐이었다.
벨렉의 설원 위에서는 모든 것이 조용했다. 하지만 사막의 태양 아래, 카쉬에서는 모든 것이 제각기 숨을 쉬었다. 모래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진득한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공기는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거리에는 온갖 상인과 행인들이 엉켜 있었고, 바닥을 쓸고 다니는 얇은 천과 장신구들이 반짝였다. 짙은 피부색과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하얀 피부와 연분홍빛 머리카락, 그리고 청록색 눈동자를 지닌 나는 그 자체로 눈에 띄었다. 눈길을 피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내 몸을 훑는 시선들은 거리의 모래먼지보다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결국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몇 번의 험한 시선을 견디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만으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거리는 생각보다 더 잔혹했다. 며칠 만에 가진 돈이 바닥을 드러냈고, 닳아가는 체력과 함께 선택지도 점점 줄어들었다. 물 한 모금조차 쉽게 구할 수 없을 때, 나는 처음으로 데인이 남겨주는 대신 머물러주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랑자인 그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없었다. 고작 구해졌을 뿐인 사람이, 무엇이라고 방랑가의 발걸음을 멈추겠는가.
그런 생각을 할 즈음,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단단하고 거칠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낮고 비열한 웃음소리, 단호하게 주고받는 거래의 언어, 그리고 나를 밀어 넣는 듯한 강한 손길이 이어졌다. 나는 그제야, 카쉬에서 혼자 있는 동안 내 선택지가 줄어들었던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내게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그에게 구해졌을 때도, 이렇게 홀로 카쉬에 남겨졌을 때도.
바자르의 사람들 앞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는 중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야만 했다. 그래야… 그가 구해준 것이 그나마 의미가 있을 테니까. 그래야 내가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고 믿을 수 있을 테니까.

 

 

# "...미안하다. 너무 늦게 왔군." / 마치 그는 애초부터 내게 올 것이었던 것 처럼 말했다.

아예 무희로 팔려간 상황을 해보셨다는 다른 분의 댓글에 착안해서 이번엔 시작점을 설원에서 데려가주세요 or 안 데려가주시면 여기서 죽을거에요 모드가 아니라 카쉬로 잡아보았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져서 진짜 팔지는 못했다...

더보기

데인은 샤미르 상단의 거래 현장을 보러 카쉬의 시장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자히라가 부탁한 것이었다. 샤미르가 늘 데인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자히라도 큰 거래가 있을 때면 늘 그를 찾았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시장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 시선이 돌아갔다.
상인들이 모여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데인은 자신의 키가 큰 것을 이용해 멀리서도 무리 사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분명 벨렉에서 구해냈던 그 소녀였다.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그대로였다. 데인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담배를 꺼내물었다. 불을 붙이고 천천히 연기를 내뿜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분명 카쉬까지만 데려다주고 떠났다. 그게 맞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고, 그 또한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벨렉에서 구해낸 것도 우연이었고, 카쉬까지 데려온 것도 그저 최소한의 선의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은...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소녀는 노예시장에 팔려나올 모양이었다.
"...하아."
데인은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를 비벼 껐다. 이런 귀찮은 일은 샤미르한테 맡기고 싶었지만... 그는 발걸음을 돌려 경매장으로 향했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사막의 햇살 아래서 반짝였다.

 

물건을 사고파는 카쉬의 바자르는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상인들은 제 물건을 더 비싸게 팔기 위해 끊임없이 흥정을 벌였고, 모래 위를 질주하는 낙타와 수레들이 먼지를 일으켰다. 향신료의 짙은 향과 구운 고기의 냄새가 공기 속을 떠다녔고, 목이 쉬도록 외쳐대는 호객꾼들의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사람을 사고파는 경매장은 달랐다. 그곳엔 활기가 없었다. 오직 차가운 계산과 거칠고 노골적인 욕망만이 가득했다. 바닥에 깔린 화려한 카펫은 품위가 아니라 손쉽고 돋보일 거래를 위할 장식일 뿐이었다. 기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자들은 각자의 손가락을 까닥이며 값을 올렸고, 희미한 촛불 아래 드리워진 가면들은 숫자에만 관심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마지막 순번으로 내던져졌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을 마지막에 남겨둬야 열기가 더 뜨거워질 테니까.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불리는 숫자가 점점 높아졌다. 나를 보고 웅성거리는 소리들, 시선을 주고받으며 신중하게 값을 매기는 태도들, 그리고 내 몸을 한 치 앞에서 훑는 탐욕스러운 눈빛들. 어느 상인의 노리개로 팔려가는 밤이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카쉬의 무희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저울질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내 가치는 이제 얼마나 아름답게 흔들리느냐에 달려 있었다. 고작 몇 마디 주고받으며 결정되는 가격표가 내 인생을 규정할 테지만, 그래도… 무희는 노리개보다는 나을까. 나는 결국 피식 웃어버리고야 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벨렉에서 아무것도 익히지 못한 채 떠나온 내가 무엇이라고. 불타지 않기 위해 꺾인 꽃은 이제 짓밟히고 시들어갈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나는 데인을 원망하지 않았다.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방랑가였다. 처음부터, 언제나. 그가 머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는 내게 등을 돌렸고, 나는 이렇게 되었다.
대상을 찾지 못한 원망은 결국 스스로를 향했다. 연분홍빛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 그리고 하얀 피부. 이 모든 것은 나를 벨렉의 화형대로 밀어넣었고, 누군가의 눈에 띄게 해서 이제는 카쉬에서 팔려나가도록 만들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있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데인은 경매장 가장자리에 서서 경매를 지켜보았다. 검은 가죽 부츠와 짙은 색 튜닉을 입은 그의 차림새는 카쉬의 화려한 옷들 사이에서 도드라졌다. 은발과 잿빛 눈동자의 조합은 이국적이었고, 키도 커서 자연스레 시선이 모였지만 데인은 그런 시선들을 무시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경매대 위의 소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래. 무희로 팔아넘기려는 거로군."
데인은 이를 악물었다. 소녀의 연분홍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는 사막의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보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보물은 지금 카쉬의 욕망 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다. 카쉬의 무희들은 겉보기엔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실상은 노예와 다름없었다.
데인은 주머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내 손 안에서 굴렸다. 사실 그는 이런 상황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벨렉에서 구해낸 것도, 카쉬까지 데려온 것도 이미 충분한 선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카밀이 그를 주워 키워주지 않았다면, 그 역시 이런 경매장에서 팔려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흥정을 시작해볼까."
데인은 천천히 경매장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확고했다. 마치 운명처럼.

 

나는 그저 이곳에서는 또 하나의 상품일 뿐이었다. 그리고 상품이란 마땅히 비싼 값에 팔려야 했기에, 가능한 한 아름답게 꾸며져 전시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재밌게도 나는 그렇지 않았다. 걸쳐진 것이라고는 조악한 천으로 된 의상뿐이었다. 어깨와 허리를 드러내는 상의, 그리고 골반에 걸쳐져 아래로는 떨어지지만 길게 트여 있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허벅지는 물론이고 그 안쪽까지 드러날지도 모르는 치마자락. 도대체 이 꼴을 하고도 저 숫자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숫자는 끊임없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손목은 밧줄로 묶였지만 발목은 무형의 시선들에 옭아매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천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런 시선들이 내 옷을 알아서들 벗겨내고 있는 것 같았다.
낙찰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숫자가 멈추고, 저 멀리 앉아 있던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가 내 앞에 다가와 내 팔을 잡아 끌었다. 이 이상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 숫자 앞에서, 나는 버티지 않았다.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니 얇은 치마자락이 다리에 감길 때마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아직 경매 주최자의 망치가 내려쳐지지 않았지만 팔을 잡아 끌던 손길은 어느새 천이 헐겁게 매달려 있는 허리를 스쳤다. 장식으로 두른 가면 너머로 얕게 뜬 눈이 내 몸을 훑었다. 길고 가는 손길이 내 턱을 올렸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양손이 묶인 채로는 벌써부터 나를 희롱하려 드는 그 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게 벨렉의 화형대와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차이가 있다면 거기서는 끝이라도 낼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 끝마저 낼 수 없다는 것 하나뿐인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했다. 구해진 나는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정작 내게 살아갈 날들을 쥐어준 이는 나를 카쉬에 약간의 돈과 함께 두고 떠나갔고, 그는 이미 내 모습은커녕 존재조차 잊었겠지만. 하지만 나는 그래선 안 됐다. 나는 그를 기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가 살려준 만큼 살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더듬는 남자의 손을 보며 입맛이 썼다. 이런 장면은 카쉬에서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내 분노를 가라앉히진 못했다. 이 분노는... 벨렉에서 그녀를 구해낸 것이 무의미해졌다는 데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카밀이 나를 주워 키워주지 않았다면 나 역시 저 자리에 있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와서야 내가 그녀를 카쉬에 혼자 두고 간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이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을까.
"잠깐."
내 목소리가 경매장에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천천히 걸어나가며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무거운 주머니를 손바닥 위에서 한 번 튀기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가격을 두 배로 부르지. 더불어..."
나는 샤미르의 인장이 새겨진 반지를 들어올렸다. 이것은 샤미르가 내게 준 것으로, 카쉬에서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했다.
"이 경매는 불법이야. 샤트의 총독이신 샤미르 님께서는 인신매매를 엄격히 금하고 계시지. 지금 당장 이 자리를 파할 것을 명한다."
경매장이 술렁거렸다. 나를 알아본 자들이 속속 자리를 피했다. '방랑가 데인'이라는 이름은 이미 카쉬에서도 유명했고, 내가 샤미르의 의형제라는 것 역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끝에 숫자를 담아 사람들을 사들이던 이들부터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소파와 카펫 위에 앉아있을 떄는 그토록 거만했던 이들이 '방랑가 데인'과 샤미르의 인장 반지 앞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모습들이 가관이었다. 아마도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를 사들였을 것이 분명했던, 그리고 그랬기에 낙찰 선언이 떨어지기 전부터 나를 희롱하던 사내만이 내게 미련을 가진 듯 끝까지 내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데인의 시선이 사내를 향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강하게 돌려서 사내의 손아귀에서 내 얼굴을 빼냈다. 손목이 묶인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
왜 한 번 버리고 나서 또 이런 짓을 하는지. 적어도 방랑가 데인이라면 주웠다가 버리기를 반복하는 악취미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곳에 나타나서 나를 사려고 들었던 것이었을까. 그가 나를, 모든 이들과 같은 의미로 원했다면 벨렉에서 카쉬까지 오는 열흘동안의 일정에서 충분히 기회가 있었을텐데. 심지어 샤미르의 인장 반지까지 들고 나타나서 저러는 이유를... 나는 알 수 없었고, 묻고 싶지 않았다. 질문하는 순간 또다시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아직까지는 그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만약 내게 두 번째 경험이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로 그를 원망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내 생존을 위한 발버둥 위에 누군가를 위한 원망까지 얹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도 버거웠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더듬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의 가면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에는 여전히 욕망이 가득했다. 그는 내게 저항하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더 세게 붙잡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 치워."
내 목소리는 차가웠다. 남자가 움찔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가 신음을 내뱉으며 그녀에게서 손을 떼었다.
"다시 한 번 이런 짓을 하면... 그땐 내가 아닌 샤미르를 직접 상대하게 될 거야."
위협적인 목소리에 남자는 재빨리 도망쳤다. 나는 그녀의 묶인 손목을 풀어주었다. 그녀의 피부는 차가웠다. 밧줄 자국이 선명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연고를 꺼내 그녀의 손목에 발랐다. 그녀는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녀를 구해놓고 혼자 내버려두었으니까.
"...미안하다. 너무 늦게 왔군."

 

벨렉에서 카쉬까지의 짧았던 동행 속에서 익숙해졌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잿빛 눈동자를 마주한 내 눈에 삽시간에 눈물이 고여드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다문 입술 안쪽으로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적어도 여기서, 이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또다시 떠나갈 그를, 그 무엇으로도 잡고 싶지 않았다. 늦게 왔다니. 마치 그는 애초부터 내게 올 것이었던 것 처럼 말했다.
"제게 사과를 하실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다고 해야하죠. 이렇게 또 한 번, 살아남았으니까요."
차오르는 울음을 삼킨 탓에 목소리가 떨렸지만, 애써 숨을 고르며 입술을 움직였다. 발음만이라도 뭉개지지 않길, 그리고 내 시선이라도 흔들리지 않길 바라며. 하지만 나는 이 이상 이을 말을 찾지 못했다. 이제 또 떠날 것이냐고 물을 수도 없었고, 이제 나는 어떡하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물으면 내가 너무 비참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사이로 느껴지는, 내 손목에 연고를 바르는 그의 손길이 너무나도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이 숨소리인지, 한숨인지, 아니면 흐느낌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매정하지. 끝까지 매몰차게 돌아서서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지. 왜, 당신은, 이토록... 자꾸만 나타나서 나를 구해내고야 마는 것일까.

 

내 손가락 끝에서 연고가 그녀의 손목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차가웠고, 그 차가움이 내 가슴 한켠을 찔렀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울지 않으려 애쓴 탓에 깨물린 입술이 붉었다. 감사하다니. 내가 그녀를 카쉬에 혼자 두고 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제 내 책임이야."
그녀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그녀의 손이 작게 떨렸다. 내가 또 떠날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녀를 구해놓고 혼자 내버려두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샤미르의 궁전으로 가자. 거기서 너를 위한 방을 마련해줄 거야. 네가 원한다면... 마법도 가르쳐주지. 네 안에 마력이 가득한 걸 느낄 수 있거든."
내 말에 고개를 든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작은 어깨에 둘러주었다. 얇은 천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피부가 남들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 싫었다. 이제 그녀를 더 이상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이건 내 책임이자... 선택이었다.

 

골목에서 경매장으로 끌려가 내세워지는 그 사이에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하루 사이의 일일 수도 있었고, 며칠에 걸려서 일어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골목에서 낚아채일 때 내 입을 틀어먹고 기절시켰던 이들의 탓이었다. 그 것이 내게서 공기를 빼앗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게 약을 먹였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랬기에 경매장 밖으로 나왔을 때 시선 속에 들어왔던 석양을 나는 잠시나마 바라보았다. 경매장에서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불빛 아래에만 있었던 눈이, 그 석양만으로도 부셨다.
그의 망토를 걸치고, 그를 따라 다시금 걷는 길은 내가 알던 길들이 아니었다. 나를 보고는 수군거리고, 그 시선 끝의 생각에서 이미 내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는 것이 차라리 나았을 것만 같았던 사람들은 데인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흔들어가며 인사를 건넸다. 그 사이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아직 열기가 남은 오후의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벨렉에서부터 카쉬까지, 오랜 시간동안 소리를 죽여가며 걸었던 발걸음은 황금 궁전 앞에서 멈추어섰다. 나는 알지조차 못했던 곳이 그에게는 익숙한 곳이었다. 화려한 장식의 문 앞에서, 신발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던 내 발 밑으로는 금빛이 번졌다.

더보기

궁전 앞에서 그녀의 맨발을 보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벨렉에서 구해낸 뒤로 그녀는 제대로 된 신발 한 켤레 없이 이곳까지 왔다. 이제야 그걸 눈치챈 내가 한심했다.
"잠깐."
그녀를 안은 채 궁전 안으로 들어섰다. 가벼웠다. 너무 가벼워서 가슴 한켠이 아팠다. 시종들이 달려와 인사를 했지만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내 방은 샤미르가 늘 비워두는 곳이었다. 나는 그녀... 아니, 이제는 리안을 침대에 앉혔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리안'이야. 작약을 뜻하지. 벨렉에서 구해낸 그날, 네가 화형대에 묶여있던 모습이 마치 꽃처럼 보였거든."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내 손등을 간지럽혔다. 마치 작약 꽃잎이 스치는 것처럼.
"이곳이 네 새로운 시작이 될 거야."

 

구해주었다가, 혼자 두고 떠났다가, 돌아와 다시금 나를 구해낸 그는 내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리안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작약이라는 의미보다, 이름을 지어준 내가 그에게 가질 의미를 알고 싶었다. 왜 이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일까. 체념과 기대, 절망과 희망 속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름이란 불리는 사람보다 부르는 사람에게 더 많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려 하는지, 어떤 의미로 부르려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그 뜻을 묻는 순간, 나는 그 의미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인데, 내가 의미를 부여하려 드는 것일까봐 두려웠다.
"...리안."
입술을 달싹이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처음으로 발음하는 것처럼. 리안이라는 이름은 내가 겪었던 시간들과는 다르게 동그랗게 굴러갔다. 데인의 공간 안에 자리한 채, 나는 내게 붙여진 새로운 이름을 되뇌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름이라는 것은 나를 나타내면서도 내가 붙일 수 없이 불리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내 것이면서도 내게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들처럼.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감정이 가슴 속 깊이 가라앉았다가 떠올랐다. 나를 규정하는 무언가가 다시 생긴다는 것의 무게는 익숙하고도 낯설었다. 한 번 버려진 것을 다시 주운다고 해서 처음과 같은 것이 아니듯, 이름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리안이라고요."
이건 내 것이 맞을까. 이제 와서 다시 붙여진 이름을 받아들여도 괜찮을까. 어쩌면 이 이름도 결국,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손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이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야 이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사람이 사라지면 나는 또다시 잃게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오래도록 이 이름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이 또한... 그의 발걸음처럼,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금 스쳐 지나가게 될까.

 

"이름은 그저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야. 이건 약속이기도 해."
그녀의 떨리는 손끝을 바라보던 나는 그 차가운 손을 잡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녀의 손이 놀란 듯 움찔거렸지만, 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 네가 다시는 혼자가 되지 않을 거란 약속. 난 네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 약속을 기억할 거야."
작약은 한번 뿌리를 내리면 여러 해 동안 피어나는 꽃이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되길 바랐다. 이제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매년 봄이면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그리고 나는... 그 곁에서 그녀가 시들지 않도록 지켜줄 것이다.
"리안. 이제부터 네 이름이야. 벨렉에서의 기억도, 카쉬에서의 일도 모두 잊어. 대신 이곳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자. 내가... 곁에 있을게."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나는 한번 그녀를 버리고 떠났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엔 정말로 지키고 싶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이 멈출 때까지 그녀를 안았다. 이제 그녀는 리안이었다. 내가 지켜야 할, 내 약속이자 책임인 리안.

 

무심한 시선과 나른한 말투를 지닌 데인의 입술이 이마에 전하는 온기와 부드러움이 이질적이었다. 차갑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건네는 미묘한 따뜻함, 그 아래에서 나는 그가 내뱉은 약속의 무게를 가늠했다.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 다시는 혼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약속. 그가 리안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이 약속을 기억하겠다는 다짐. 그나마 그는 벨렉에서 카쉬로 오는 동안 내게 단 하나의 약속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게 약속을 건넸다. 단순한 위로도 아니고,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 약속을 받아들이고 믿어야만 할까. 이렇게 말로만 하는 약속은 쉽게 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차마 그를 의심할 수 없어서, 그저 그와 내가 속한 이 세상을 의심했다. 그랬기에 나는 그의 마음에 대고 묻고 싶었다. 진정으로 이 약속을 하는 것이냐고.
"과거는 잊는다고 잊혀지지 않죠. 흐려지고 덮어질 뿐이니까."
벨렉의 화형대도, 카쉬의 경매장도. 죽음과 체념 사이에서 벨렉은 나를 노리는 곳이 되어 있었고, 카쉬는 내가 버려진 곳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아마도 악몽이 될지도 모르는 기억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내가 어떠한 이름을 가지던 간에, 살아있는 한 나와 함께할 것이었다. 내가 감당하고 끌어안고 가야만 하는 것들.
"하지만 제가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 순간, 저는 새로운 기억을 쌓으며 지금 이 순간을 시작으로 정의해야 하겠죠."
데인이 말한 약속이 그의 다짐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 역시 그 이름 아래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는 걸까. 그렇게 하면, 정말로 과거는 희미해질까. 아니면 단순히 새로운 것들이 그 위에 덮이기만 할까. 이름이 주어졌고, 약속을 들어버렸으니, 나는 커다란 나뭇가지에 의지해 새로이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야만 했다. 그가 이번만큼은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구해진 몫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나는 끝없이 두려웠다. 스스로를 방랑자로 정의하기에 또다시 언젠가 훌쩍 떠날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고싶어하는 자신이.
"...데인."
벨렉을 떠나는 설원 위에서 그가 알려준 이름이 카쉬가 있는 사막 위에서 퍽 오랜만에 내 입에 담겼다. 그가 내게 이름을 붙인 이유는 내가 존재하길 원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당장 어찌될지를 말로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저 그의 이름을 부르고, 나를 안아주는 그의 옷자락 끝만을 가만히 손에 쥘 뿐이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자 가슴 한켠이 묘하게 울렸다. 벨렉에서 카쉬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났던 것처럼, 그녀 역시 나와의 거리를 두려 했던 걸까. 나는 그녀의 떨리는 손이 쥐고 있는 내 옷자락을 바라보았다.
"과거는 잊히지 않아. 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기억이 쌓이면...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가. 마치 사막의 모래처럼, 시간이 지나면 바람에 날려 희미해지는 발자국처럼."
내 말에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이제는 내가 그녀를 따뜻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더 이상 차갑지 않도록.
"네가 지금 나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증명해 보일게. 이번엔 정말로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러니까..."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작약꽃이 흔들리듯,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하는 나를.
"...내가 증명할 시간을 줘."

더보기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청록색 눈동자가 내 말을 음미하듯 천천히 깜빡였다. 그 순간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데인!"
샤미르였다. 그는 화려한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들어왔다.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날카로운 표정이었다.
"내 인장 반지로 경매장을 엎었다고? 네가 미쳤구나. 그 자식들이 얼마나..."
샤미르의 말은 리안을 보는 순간 멈췄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의 차림새를 훑었다. 상품으로서 전시하기 위해 입혀졌던 얇은 천 조각같은 옷... 경매장에서 입힌 그것은 당장 찢어버리고 싶었다.
"...목욕물을 데우게 하마. 자히라를 불러 옷도 가져오도록 하지."
샤미르가 문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그가 화난 이유를 알았다. 그는 자신의 자치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이제 이 아이는 내 책임이야. 네 인장 반지는 그저... 빌렸을 뿐이고."
샤미르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나를 잘 알았다. 내가 한 번도 누군가에 대해 '책임'을 운운한 적이 없다는 것을. 11년간의 방랑 생활 동안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단 한 번도 곁에 두지 않았다는 것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샤미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의 날카로웠던 표정이 조금씩 풀어졌다.
"하지만 그 경매장은 내가 처리하마. 네가 구해낸 이상... 그들이 다시는 이런 짓을 못하도록."

 

벨렉에서 카쉬로 오는 열흘 간의 여정동안, 데인은 아주 드물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었다. 그 중에는 샤미르가 꽤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지금 데인의 방으로 문조차 두드리지 않고 들이닥친 사람이 샤미르라는 것을 어렵지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인장 반지에 대한 이야기와, 문 밖을 향해 소리치자 재빠르게 달려온 하인들이 목욕물을 준비하는 것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치구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총독의 반지를 사전 동의 없이 썼다면 당연히 문제가 될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경매장이 합법일 리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의 '책임'일 뿐이기에, 내가 이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그저 샤미르와 데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서서는 달려온 하인들이 데워온 목욕물이 날라진 그의 욕실로 향했다. 서늘한 사막의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목욕물 덕분에 따뜻한 문 안에서는 혼자였다. 그 너머로 샤미르와 데인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지만,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듣지 않고 몸에 걸쳐졌던 것들을 벗어내렸다. 따뜻한 물 안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나니 그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매장으로부터가 아니라, 벨렉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샤미르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욕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습기 어린 온기가 그녀가 목욕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섰다. 샤미르의 말대로라면 자히라가 곧 옷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그녀가 입고 있던 그 천 조각은 내가 직접 불태워버리고 싶었다.
벨렉에서 카쉬까지 오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주지 않았다. 그저 내 망토로 그녀의 몸을 가리는 것에 그쳤을 뿐. 그리고 그렇게 혼자 두고 떠난 나의 부주의함이 결국 그녀를 경매장으로 이끌었다. 내 잘못이었다. 침대 위에 걸쳐져 있던 망토를 집어들었다. 그녀의 체온이 남아있었다. 창 밖으로는 카쉬의 붉은 석양이 황금 궁전의 첨탑을 물들이고 있었다.
"내가 증명할 시간을 줘."
내가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머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를 구하고 난 뒤, 카쉬를 떠나려 했을 때 느꼈던 이상한 감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마치 작약이 꽃잎을 틔우듯, 서서히 퍼져나가는 그 감정을 나는 처음 느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히라였다. 그녀의 팔에는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진 옷가지들이 걸쳐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했다. 자히라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 이내 들려오는 그녀들의 대화 소리. 자히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리안이 작게 답하는 소리.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제 그녀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녀가 다시는 그런 천 조각같은 것을 입지 않아도 되도록.
밤이 깊어가는 사막의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방랑자로서의 삶이 이제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생각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쩌면 이런 변화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홀로 방랑하면서 다른 이들에 대해 신경을 써본 적이 없었을 그였기에, 벨렉을 떠나 그를 따라 설원과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안 옷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자히라가 들고 온 옷들을 보고서는 나도 모르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욕실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온 자히라의 목소리는 그 동작만큼이나 부드러웠고, 나 역시도 자연스럽게 자히라에게 맞춰 나직하게 이야기를 했다.
"...불편했냐고 물으시면, 아니라고는 차마 말씀 못 드리겠지만요. 지금은 제가 불편한 것 보다, 보이는 것이 더 문제인 것 같네요."
작은 한숨은 좁지 않은 욕실에서 더욱 크게 들리는 것 같아, 나는 길게 내쉬는 대신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이쪽에 놓아두고 가고, 나머지 옷들은 밖에 준비하겠다며 나를 다독이고 나가는 자히라에게 욕조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고개만을 숙여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다시금 혼자가 된 다음에야 너무 오래 있었단 생각이 들어 몸을 일으켰다. 자히라가 가져온 옷은 옅은 모래색의 긴 드레스였다. 팔과 다리 부분은 반투명한 천으로 되어있어 그 자태가 드러나고 바람을 들일 수 있도록 되어있었지만, 가슴 부분이 과하게 파이지는 않은 그 옷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걸치고 있던 그 얇은 천조각을 손에 든 채, 비로소 제대로 옷 다운 옷을 입고서는 욕실 문을 나섰다.
"...죄송해요. 제가 좀 오래 걸렸죠?"

 

옅은 모래색 드레스를 입고 나온 그녀를 보자 나도 모르게 숨이 멎는 듯했다. 자히라가 가져온 옷은 샤트의 전통 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반투명한 소재로 된 소매와 치마 자락이 그녀의 하얀 피부를 은은하게 비추었다. 벨렉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이제야 제대로 된 옷을 입고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늦지 않았어. 오히려... 잘 어울리는군."
무심한 듯 던진 말이었지만, 내 시선은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창 밖으로 비치는 석양이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작약이 활짝 피어난 것처럼. 내가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의 의미가 이제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경매장에서 입었던 그건... 내가 처리하지."
그녀의 손에 들린 천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천이 아니었다. 그녀가 겪었던 모든 불행과 공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것을 건네받았다. 손끝에서 마력이 일었다. 붉은 불꽃이 피어올라 천을 태우기 시작했다.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지는 천 조각을 보며, 나는 그녀의 과거도 저렇게 흩어져버리길 바랐다.
"이제 네 방으로 안내해주마. 자히라가 준비해둔 곳이야... 마음에 들길 바라."

 

샤미르의 황금 궁전은 밤이 되면 더욱 화려해졌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보이는 벽화와 장식들은 모두 금빛으로 빛났고, 곳곳에 놓인 등불은 따뜻한 불빛을 내뿜었다. 나는 그녀를 안내하며 걸었다. 그녀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치 공기처럼 가볍게.
"여기야. 내 방 옆이라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와도 좋아."
자히라가 준비한 방은 예상대로였다. 붉은 비단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 푹신한 침대, 화장대와 옷장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는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일부터 네게 마법을 가르치도록 하지. 네 안에 있는 마력... 그걸 제대로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해. 아침 식사 후에 궁전 뒤편 정원에서 만나도록 하자.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불편한 게 있다면... 내 방문을 두드려. 난 늘 깨어있으니까."
그녀의 방을 나와 내 방으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보이는 카쉬의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늘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키고, 함께하는 삶. 11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이 감정이 낯설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샤미르의 소유인 황금 궁전에서 자히라가 준비해주었고, 그가 안내해주었지만 이제는 내 방이 된 공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옆방이라고 한들 비어있었을 것만 같은 공간에 어느새 어엿하게 채워진 것들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곳에는 전 주인이 있었기에 이렇게 화장대까지 갖춰진 것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비어있던 공간이었지만 자히라가 눈치껏 빠르게 준비해준 것일까. 사실 그 생각은 필요가 없을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 제법 오래도록 머물게 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나간 일들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도, 이제는 살아야만 하는 것이 아닌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기에 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것이었기에.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따뜻한 차와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담긴 쟁반을 든 하인이 들어왔다. 탁자에 은쟁반이 닿는 소리와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서 들리고 나니 다시금 방 안에는 내 숨소리만이 남았다. 찻잔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마음에 들어서 나는 한동안 양손으로 찻잔을 감싼 채 그것을 내려놓지 못했다. 벨렉은 늘 추웠고, 카쉬는 해가 없는 시간에 서늘했기에 내게는 모든 온기가 소중했다.
그리고 차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우연히 마주한 데인을 따라 정해진 결말을 향해 걸었던 설원에서 걸치고 있었던 그의 망토에서 났던 향이었다. 나는 비로소 그 향이 샤트의 것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그를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한동안 이어지던 생각의 끝에서 나는 찻잔을 모두 비웠고, 담겨있던 과일을 준비했던 사람이 무안하지 않도록 몇 조각 먹은 다음에 쟁반을 문밖에 내어놓았다.
침대에 누우니 비로소 피로가 몰려왔다. 그 피로는 오늘의 것만은 아니었다. 내 기억속에서 지워버린 그 이름으로 살아오는 동안부터 오래도록 쌓여왔던 것이었다. 벨렉의 화형대 위에서 채 불살라지지 못했던 것이, 샤트의 사막 위에서 채 말라 없어지지 못했던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날,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내 방 안의 창가에 기대어 서서 담배를 피우며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듯, 그녀의 과거도 저렇게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벨렉에서의 기억, 경매장에서의 기억... 그리고 내가 그녀를 혼자 두고 떠났던 그 시간의 기억까지.
테이블 위에 놓인 마법서들을 바라보았다. 내일부터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녀의 마력은 풍부했다. 그것은 벨렉의 화형대 위에서 처음 느꼈던 것이다. 통제되지 않은 마력이 불꽃처럼 일렁이던 그 순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잠시 후 창문 밖으로 제피르가 날아왔다. 제피르의 발톱에는 작은 쪽지가 들려있었다. 샤미르의 글씨체였다.
[경매장은 내일 아침에 처리하도록 하지. 그 전에... 그녀를 데려왔다면 책임져야 할 텐데.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 믿어보마. -샤미르]
나는 쪽지를 불태워버렸다. 제피르는 잠시 내 어깨에 앉아있다가 다시 날아갔다. 나는 다시 한 번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책임... 그래. 이제 나는 그녀에 대한 책임이 있다. 11년간의 방랑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갔다. 나는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옆방에서 그녀가 잠들어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하게 설렜다. 마치...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닿았던 시간이 운명으로 정의되었다

더보기

카쉬의 아침은 늘 고요했다. 해가 뜨기 전, 사막의 차가운 공기가 창문을 두드렸다. 나는 이미 깨어있었다. 아니, 어쩌면 잠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밤새 그녀의 방에서 소리가 나지 않나 귀 기울이고 있었으니까.
자히라가 가져다준 아침 식사를 기다리며 창가에 서있었다. 사막의 붉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쳐야 한다. 벨렉에서 보았던 그 폭발적인 마력을 어떻게 다루게 할 것인가... 내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마법서들로 향했다.
"총독님께서 경매장은 오늘 아침에 처리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자히라가 차와 식사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그녀의 뒤로 하인들이 따라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아침 식사가 차려졌다. 샤트의 전통적인 아침 식사. 구운 빵과 과일, 그리고 향신료가 들어간 차.
"그리고... 리안 아가씨도 곧 깨어나실 것 같습니다. 하인들이 말하길 밤새 평온히 주무셨다고 하더군요."
자히라의 말에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악몽에 시달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히라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있을 때쯤, 옆방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사막의 아침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붉은 빛이 황금 궁전을 비추었다. 오늘부터 그녀와 나의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화형대로 끌려갈 날을 알지 못했었다. 정확히는, 내가 그 존재가 될 줄을 몰랐다. 어느날 눈을 떴을 때 내가 그 제물이 되어있었고, 그랬기에 나는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바뀌는 경험을 그날로부터 몇 번이고 해왔다. 나는 그저 눈을 떴을 뿐이었는데 화형대로 끌려가던 아침, 나를 구해놓고도 돌아보지도 않는 데인을 따라 무작정 걷다가 설원에 쓰러졌던 그 순간, 그리고 홀로 남았던 카쉬의 골목에서 잃었던 정신을 차려보니 보였던 노예 경매장의 풍경. 그랬기에 눈을 뜨자마자 드는 감정이 안도라는 것은 퍽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잠들기 전과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닫아두지 않았던 붉은 커텐이 달려있는 창문으로는 완전히 떠오른 태양의 빛이 잔뜩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아직까지는 조금 서늘한 공기 사이로 희미하게 익숙한 냄새가 났다. 카쉬의 냄새가 아닌, 담배 냄새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안도했고, 그것만으로도 안도하는 스스로를 향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결국 그 감정들이 뒤섞여 작은 한숨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어제 저녁에 그랬던 것 처럼, 오늘 아침에도 하인 하나가 와서 아침 식사를 놓아주고 갔다. 구운 빵과 과일, 그리고 향신료가 들어간 차.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그만큼의 온기가 남아있는 빵을 베어물었다. 혼자임에도 혼자가 아닌 것만 같은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궁전 뒤편 정원으로 가기 전, 나는 잠시 그녀의 방문 앞에 멈춰섰다. 문 너머로 그녀가 아침 식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빵을 베어무는 소리, 차를 마시는 소리... 그 소리들이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드디어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막의 아침 햇살이 정원을 비추고 있었다. 샤미르가 들여온 희귀한 식물들이 아침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정원 한가운데 있는 분수대 근처에 섰다.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을 것이다. 물은 마력을 다루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원소니까.
제피르가 내 어깨에 앉았다. 그의 부리에는 또 다시 샤미르의 쪽지가 들려있었다.
[경매장은 처리했다. 그들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그녀를 가르친다고? 네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처음이군. -샤미르]
나는 쪽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제피르는 내 어깨를 살짝 쪼더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날개 짓이 일으킨 바람에 정원의 꽃들이 흔들렸다. 그 중에는 작약도 있었다. 붉은빛을 띤 연분홍색 꽃잎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마치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정원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일 것이다. 나는 심장이 살짝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부터 시작될 우리의 시간이 어떨지... 나는 처음으로 기대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에게 아침 식사 후에 궁정 뒤편 정원에서 만나자고 했었다. 마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그 목적과는 달리 약속은 퍽이나 불친절했다. 궁정 정원의 정확한 위치도, 가는 길도 말해주지 않앗다. 덕분에 처음 들어와본 황금 궁전 안에서 나는 잠시나마 길을 잃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 몇 번을 돌고 나서야 지나가던 하인을 잡고 물어볼 수 있었다. 작은 분수대가 있는 정원에는 이미 그가 와 있었다. 문득, 이 공간에서 나만 길을 헤맸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우스웠다. 그는 원래부터 이곳에 속해 있던 사람이었고, 나는 여전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도착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작게 한숨을 삼키며 한 걸음 내딛었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나도 모르게 먼저 사과부터 나왔다. 결국 나는 시작부터 또 그에게 미안해지고야 말았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에게 구해졌고, 그에게 또 구해져서 결국 그의 책임이 되어버렸으니까. 나는 언제쯤 그에게 그런 존재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내가 그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그의 곁에 없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쉽게 뻗어나가려는 생각을 붙잡아두고는 나는 다시금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인사가 늦었지만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목소리의 무게를 덜어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목소리의 무게를 덜어냈다. 조금이라도 이 순간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속하지 않은 공간에 속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고, 그마저도 그의 책임으로 둘 수 없었다.

 

그녀가 늦어서 사과하는 것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무게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녀가 자신을 책임이라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늦지 않았어. 나도 방금 왔으니까."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이곳에 와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길을 헤맸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안내하지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이 공간을 익히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곳은 이제 그녀의 공간이기도 하니까.
"자, 이제 시작하지. 우선 네 안의 마력을 느껴보도록 해."
나는 그녀의 앞에 섰다.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도 그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이슬을 머금은 작약처럼.
"눈을 감아. 그리고 네 안에 흐르는 마력을 느껴봐. 벨렉에서처럼...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네 옆에 있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벨렉의 기억은 아직도 그녀를 괴롭히고 있겠지.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내가 그녀 곁에 있으니까. 그녀가 눈을 감자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리안... 넌 이제 혼자가 아니야."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 역시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벨렉에서의 기억이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없었다.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내 죽음이 나를 뺀 모두에게는 당연했다. 내가 살아온 그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고, 그랬기에 저항없이 화형대로 끌려가 그 위에 묶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내일 보자고 말했던 이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묶인 곳에 쌓인 장작에 횃불을 던졌다. 그 위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보고자 했던 것은 하늘이었다. 내가 이 사람들을 보면, 나는 결국 원망을 안고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랬기에 나는 나를 불태우려던 사람들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허한 시선 끝에서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새도 아닌 것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고, 바람도 아닌 것이 내게 오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낚아채던 그의 품 안에서, 나조차 몰랐던 것이 터져나왔다. 그는 나중에야 그것이 마력이라고 설명해주었지만, 나는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가져보았던 의지라고 생각했다. 그 의지는 정작 나를 구해준 이에 의해서 한 번 꺾였지만, 결국 그는 꺾여진 그 것을 다시금 심어 뿌리를 내리게 하고 있었다. 저항하고 싶기도 했다. 내가 왜 이래야만 하냐고. 하지만 이미 살려진 이상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그가, 지금,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기에.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고, 그의 온기를 담은 손이 잘게 떨리던 내 어깨에 얹혔다. 그 것을 이정표로 삼아 나는 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아직은 무엇이라 부를 수 없는 그것은, 내가 찾아내어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영영 깨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세상이 모르고, 내가 찾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영 잊혀질 것이었다. 더듬어 찾아내는 그 노력이 어둠 속의 것만 같아도 나는 찾고 싶었다. 벨렉의 화형대 위에서 그가 나를 찾어냈을 때에 터져나왔던 그 의지에게 방향과 목적을 붙여주고 싶었다. 그 노력은... 사실, 그를 향해있었다. 구해지고 버려졌다가, 다시 되찾아져 이름이 붙여진 나의 의지는 결국, 데인이었다.

 

그녀의 안에서 마력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얼음 속에 갇혀있던 불꽃이 서서히 녹아나오는 것처럼. 내 손 아래서 떨리던 그녀의 어깨가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그녀의 마력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좋아... 그대로야. 두려워하지 마. 네 안의 마력은 너를 해치지 않아. 그건 네 의지니까."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력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벨렉에서처럼 폭발적이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마치... 작약이 꽃잎을 피우듯 천천히, 그리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마력이 내 것과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11년간의 방랑 생활 동안 수많은 마법사들을 만났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력이 반응한 적은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드디어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마력은 내 것을 부르고 있었고, 내 마력은 그녀의 것을 감싸안고 있었다.
"...놀랍군. 네 마력은 아주 순수해. 마치 새벽이슬을 머금은 작약처럼..."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의 의미가, 이제야 완벽하게 그녀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수줍음 많은 작약처럼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그녀의 마력. 그리고 그 꽃말처럼... 정이 깊어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그녀의 존재.

 

그녀의 마력이 내 것과 공명하는 순간, 정원의 분수대 물줄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그녀의 마력에 반응하듯 물방울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다른 한 손으로 그 물방울들을 끌어당겼다.
"이제 눈을 떠봐. 네 마력이 만들어낸 거야."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들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마치 작은 별들처럼 반짝이며.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에 그 빛이 반사되었다. 순간 가슴 한켠이 저릿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경이로움이, 내 안에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것 같았다.
"벨렉에서처럼 폭발적이진 않아. 하지만 이게 네 진짜 모습이야. 네 마력은... 누군가를 해치기 위한 게 아니라,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한 거니까."
말을 마치자 물방울들이 천천히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고, 그 안에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무지개가 피어났다. 마치 작약이 피어나듯 은은하게.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만나서 마법을 가르치도록 하지. 그리고... 길을 헤매지 않도록 내가 안내해줄게."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을 보고 알았다. 내가 그녀가 길을 헤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제부터였다. 그녀가 이 공간에, 그리고 내 곁에 익숙해질 시간.

 

정원의 계단을 내려가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아마도 처음 보는 풍경에 놀란 듯했다. 내가 시범으로 보여준 물방울의 춤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마력이 만들어낸 첫 번째 기적. 나는 그것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마력을 처음 깨우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니까."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가벼웠다. 마치 깃털처럼.
"과도하게 마력을 쓰면 이렇게 피곤해져. 괜찮아. 처음엔 누구나 그래."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내 가슴께에 닿았다. 달콤한 향기가 났다. 마치 작약 향 같았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궁전의 하인들이 우리를 보고 수군거렸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의 안전뿐이었다.
"이제 푹 쉬어. 내일도...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녀에게 한 약속이, 단순히 마법을 가르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걸.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더보기

카쉬에서의 날들은 느릿하고도 착실하게 흘러갔다. 그가 이름을 붙여주었던 의지는 마력이 되어 내 안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켜오고 있었다. 길을 잃지 않도록, 헤매지 않도록 안내해주겠다는 첫 수업 후의 말대로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치면 내 방의 문을 두드렸다. 나는 어느새 그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내 방문 앞에서 반드시 한두번 헛기침을 해서 인기척을 낸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느릿한 박자로 세 번만을 두드린다는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에게 문을 열어주고 나면 그의 옆에서 함께 걸어서 정원으로 향했다. 아침 이슬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간부터 시작되던 수업 시간은 내가 그에게 익숙해지는 속도로 조금씩 길어졌다. 나는 그것이, 아마도 내가 마력을 다루는 데에 익숙해져서 첫날처럼 단번에 지쳐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공명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다른 사람의 마력을 느껴본 일이 없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요."
그는 내게, 내 마력이 그의 마력과 공명한다고 말해주었었다. 함께 울린다는 그 말을 곱씹어도 나는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비교 대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비교 대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내가 그에게 무엇이라도 의미를 지닐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공명이란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치 사막의 모래알처럼 잡으려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는 그런 것. 하지만 그녀의 마력은 분명 내 것과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공명은... 설명하기 어려운 거야. 마치 사막의 바람이 야자수 잎을 흔들 때처럼 자연스러운 거지. 내 마력이 네 것을 부르고, 네 마력이 내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게 공명이야."
분수대의 물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이번에는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물과 반응한 것이다. 마치 그녀의 마음이 내 말에 반응한 것처럼.
"너는... 다른 이의 마력을 느낄 필요가 없어. 그저 네 안의 것을 믿으면 돼.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에게 하려던 말이 내 입술 끝에서 맴돌았다. '나를 믿으면 돼.' 그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녀가 나를 믿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벨렉에서 그녀를 구해놓고 혼자 두고 떠났던 나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오늘의 그는 내게 마력을 모아 형체를 갖춰보라고 했다. 시범이라며 그는 먼저 내게 마력으로 나비를 만들어 보여주었다. 그의 손끝에서 떠오른 나비를 바라보던 내 의지는 알아서 형태를 갖추어나갔다. 처음에는 그저 흐트러진 빛무리였던 것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도 같았다. 하지만 날개를 팔랑이며 내게로 다가오는 나비의 앞에서 내 손 위에 얹힌 빛은 조금씩 밀도를 높이고 형태를 갖추었다. 빛으로 만들어진 꽃송이가 내 손 위에 자리잡았다. 그 위로 그의 마력이 만들어낸 나비가 내려앉는 순간에, 이전까지는 정의되지 못했던 것이 정의되었다.
이번엔 정말로 떠나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겠다고, 경매장에서 두 번째로 나를 구해냈던 그는, 세상으로부터 버려졌고 그에게 다시금 버려졌던 내 기억들 위에 그와의 시간들을 한 장씩 올려주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기에 그 시간이 잠시일지, 영원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방랑이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조금씩 두려움을 잊어갔다. 그가 내게 이름을 지어주며 했던 약속을 믿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버려진 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에 대한 것을.
내 마력은 나를 찾아낸 데인으로 인해 화형대에서 깨어났고, 그로 인해 흐르기 시작해서 그로 인해 형태를 갖추었다. 그가 나를 구해낸 우연과 내가 살아야만 하는 필연 사이에서, 내 마력이기도 한 내 의지는 결국 그를 향해있었다. 그렇게 정의된 내 의지가 담긴 마음이 그를 향해 기울었던 것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 위에 피어난 작약을 보며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마력이 만들어낸 첫 번째 형상이, 하필 내가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의 꽃이라니. 그리고 그 꽃 위에 내 마력이 만든 나비가 앉아있는 모습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문득 벨렉에서 그녀를 구하고 혼자 두고 떠났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그녀가 이렇게 특별한 존재가 될 줄 몰랐다. 단지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그녀를 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마력이 내 것과 공명하고, 그녀의 의지가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 마력은... 네 마음을 닮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이상하게도 달라 보였다. 마치 11년간의 방랑이 끝나고 마침내 정착할 곳을 찾은 것처럼.
그때, 정원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샤미르였다. 그는 분명 우리의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톤이 섞여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데인, 잠시 이리 좀."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오늘의 수업은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마력이 만든 작약처럼, 정이 깊어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샤미르는 나를 궁전 안쪽 테라스로 이끌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랐다. 마치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제피르가 그의 어깨에 앉아있었고, 그의 발치에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와인 한 병이 놓여있었다.
"앉아, 데인.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레드 샌드' 와인을 가져왔어."
샤미르가 와인을 따르는 동안 나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분명 무언가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거의 스무해 만큼의 우정이 있었기에, 그가 말할 타이밍을 기다려주는 것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네가... 그녀를 가르치는 모습을 봤다. 마치 사막의 모래가 바람을 만나 춤추듯 자연스러웠어. 네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처음 보는데... 그녀와 있을 때의 너는 달라."
샤미르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샤미르의 말대로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의 마력이 내 것과 공명하듯, 그녀의 존재가 내 삶과 공명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뭘 하고 싶은 거지?"
"너를 붙잡고 싶어. 11년 동안 네가 방랑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거든. 넌 그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샤미르의 말에 나는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혀끝에 감겼다. 마치 지금의 이 상황처럼.
"...난 그녀를 한 번 버린 적이 있어."
"그래. 하지만 넌 다시 그녀를 찾아왔잖아? 그리고 이제는... 떠나지 않을 거야. 네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

 

샤미르의 말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엔... 아직 내 안의 무언가가 저항하고 있었다. 11년간의 방랑 생활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정착하지 않기 위한 도피였을지도 모른다.
"네가 말한 대로야. 난 그녀를 한 번 버렸어. 그리고 그 죄책감 때문에 다시 그녀를 찾아갔고. 하지만..."
말을 멈추었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정원에서 그녀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녀의 손 위에는 여전히 마력으로 만든 작약이 피어있었고, 그 위에는 내가 만든 나비가 앉아있었다. 그 광경이... 이상하게도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아. 방랑자인 내가...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어?"
"넌 이미 그녀에게 많은 것을 주고 있어. 이름도, 마법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샤미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난 네가 누군가를 이렇게 소중히 대하는 걸 본 적이 없어. 11년 동안... 넌 언제나 혼자였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그녀와 함께 있을 때의 너는... 마치 사막의 모래폭풍이 잠잠해진 것처럼 평화로워 보여."
제피르가 갑자기 날아올라 내 어깨에 앉았다. 그의 날카로운 부리로 살짝 내 귀를 쪼았다. 마치 '이 바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난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누군가에게 정착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이 두려웠어. 하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샤미르의 시선이 내 어깨 위 제피르에게로 향했다. 매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가, 정원에 있는 그녀를 향했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우리의 대화를 이해한다는 듯이.
"그래... 이제는 도망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샤미르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제피르가 놀라 날개를 펄럭였다.
"넌 정말...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구나. 어렸을 때부터 네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건 서툴렀지. 하지만 그게 네가 진심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잖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난 늘 그랬다. 카밀이 나를 데려왔을 때도, 샤미르와 형제가 되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 그녀를 만났을 때도.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넌 그저... 네 방식대로 보여주면 돼. 그녀는 분명 알아차릴 거야. 그녀의 마력이 네 것과 공명하듯이, 그녀의 마음도 네 마음과 공명할 테니까."
샤미르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피르가 갑자기 날아올랐다. 그가 정원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무언가를 결심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녀에게서도, 그리고 내 마음에서도.

 

샤미르는 '잠시'라고 말했지만 생각보다 오래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정원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강해지고 있었다. 머리카락 위로 내려앉는 햇빛이 조금씩 뜨겁게 느껴지고 있어서, 그가 없는 사이에 이리저리 형태를 바꿔보던 빛무리를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를 향한 마음만큼은 쉬이 거두어들여지지 않아서,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분수대에 살짝 기대어 섰다. 어느새 날아온 제피르가 분수대의 가장자리에 내려앉았다. 팔을 뻗어 제피르를 끌어안고 그 위에 고개를 기댔다. 작은 팔딱거림이 담긴 온기가 깃털에 가져다댄 볼에 닿았다. 어느덧 카쉬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내가 버려진 곳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곳으로서.

더보기

정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제피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제피르가, 그녀의 품 안에서 편안하게 머물러 있었다. 마치 나처럼.
분수대의 물소리가 잔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사막의 석양을 닮았다. 붉은 모래언덕 위로 지는 해가 만드는 그 찬란한 빛처럼.
"리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청록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방랑자가 아니었다. 샤미르의 말대로, 나는 이미 그녀에게 정착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붉은 모래언덕에 가보지 않겠어? 석양이 질 무렵이면 카쉬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거든."
내 제안에 제피르가 날개를 펄럭였다. 마치 동의한다는 듯이.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함께 그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황금 궁전에서의 날들은 궤도 위의 것만 같았다. 오전에 그와의 마력 수업이 끝나면, 그다음부터 대부분의 시간은 고요하게 흘러갔다. 방에서 카쉬의 거리를 바라보거나, 그가 놓고 간 기초 마법서를 읽었고, 가끔씩은 정원을 걸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내 발걸음이 향하는 곳들은 몇 군데 되지 않았지만, 그 걸음은 제법 꾸준했다. 유일하게 내 발걸음이 딱 한 번만 닿았던 곳은 그의 방이었다. 나를 카쉬에 홀로 두고 갔던 그에게 다시금 구해진 직후, 그가 안아 들고 갔던 곳. 그는 내게 불편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지만, 정작 나는 그곳을 찾은 적이 없었다. 불편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방의 바로 옆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내게 가장 먼 곳이었다.
그가 내게 붉은 모래언덕에 가자고 먼저 말한 것은 평소와 많이 다른 일이었다. 내가 움직이던 반경을 벗어나는 일이었고, 그저 맴돌고만 있던 나를 그가 잡아끄는 일이었다. 제피르가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한 탓에, 나는 품에 있던 새를 조심스레 놓아주고는 기대어 서 있던 분수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붉은 모래언덕이요?”
이름은 익숙했다. 그러고보니 자히라가 붉은 모래언덕의 석양은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라고 말해주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곳을 보러 갈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가 내게 그곳에 가자고 말했다.
"...같이 가시나요?“
그동안의 나는 그저 그가 건네는 것들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벨렉에서 구해진 내게 주어졌던 카쉬라는 목적지와 그 곳에서 홀로 남은 내게 쥐어졌던 약간의 돈, 다시금 나를 경매장에서 팔리기 직전에 구해냈던 그가 내게 붙여준 새 이름과 그가 그 안에 담아준, 나를 홀로 두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그 가운데에서 나는 단 한 번도 그에게 ‘같이’를 꺼내지 못했었다. 덕분에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내게 해줄 것이냐고.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가 그렇게 그에게 물은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그저 이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같이'라는 말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동안 우리는 마법 수업 외에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자신의 방과 정원을 맴돌았고, 나 역시 그녀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저 멀리서 그녀가 정원을 거닐거나, 창가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맴도는 발걸음은 결코 내 방으로 오지 않았다.
"그래. 같이 가자."
내 대답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마치 예상치 못한 답을 들은 것처럼.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에게 '같이'라는 말은 단순한 동행 이상의 의미였을 것이다. 벨렉에서 그녀를 구하고 떠났던 날부터, 그녀는 늘 혼자였으니까. 그동안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이름도, 거처도, 마법도.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건네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내 방문 앞에서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붉은 모래언덕까지는 말을 타고 가야 해. 카쉬 성벽 밖으로 나가야 하거든. 내 말에 함께 타도 괜찮아?"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함께'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마법을 가르쳤고, 그녀는 내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일방향적이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 건넨 '같이'라는 말은... 그 흐름을 바꾸는 것 같았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그녀를 가르치면서도 어딘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치 내가 그녀에게 주는 것들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샤미르와의 대화 후,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해가 질 무렵이면 사막의 모래가 붉게 물들어. 마치... 네 머리카락처럼. 그리고 그 위로 별들이 떨어지기 시작해. 사막의 밤하늘은 네가 본 적 없는 풍경일 거야."
이렇게 누군가에게 사막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11년간의 방랑 생활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풍경을 보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누군가와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나는 말을 탈 줄 몰랐다. 그랬기에 말 위에 올라탄 그에게 손을 내밀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동작은 내가 그에게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내밀기 전의 내 짧은 망설임이 무색하도록 내밀어진 내 손을 단번에 잡아당겨 나를 그가 타고 있는 말 위로 끌어올렸다. 내밀어진 손은 그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내미는 것도, 누군가가 그에게 내미는 것도. 새삼 그 생각을 하니 조금은 속이 쓰린 것도 같았다. 그가 나를 구했던 일들과 그가 내 옆에서 마법을 가르치는 일이, 나에게만 의미가 있는 일인 것 같아서. 그렇다면 붉은 모래언덕에서의 석양을 같이 보자는 그의 말도 그럴 것만 같았다. 나는 그 가능성을 애써 생각하지 않기 위해 그가 보지 않는 사이에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나는 그의 뒤에서 말 위에 앉아있었다. 말이 흔들릴 때 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가 알려준 대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지만, 그를 끌어안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등 뒤에서 말을 타고 가는 동안 거리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아직 카쉬에서 혼자였던 그 때, 내게 쏟아지던 사람들의 시선과 웅성거림에 익숙해졌었다. 물론 그랬다고 그 것이 편했냐면은 그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그의 등 뒤에서 내게 쏟아지는 것들을 감당할 만큼은 되었다. 나는 그 시선들을 하나씩 마주해주는 대신 적당히 하늘로 돌려 사람들이 아닌 것을 바라보았다. 내가 벨렉의 화형대에서, 나를 그 위에 묶고 내 발 아래 장작에 횃불을 던지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기 위해 그랬던 것 처럼. 카쉬의 거리에서, 그의 등 뒤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묶었고 내 발 아래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던져졌고, 나는 그 사람들 역시도 바라보지 않았다.
말의 걸음은 카쉬의 성문 밖으로 이어졌다. 벨렉을 떠나 이 곳에 왔을 때는 성문을 지나서 그와 헤어졌는데, 지금은 그의 등 뒤에 앉아서 붉은 모래언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죽이고 있던 숨소리가 비로소 길게 터져나왔다. 붉은 모래언덕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찍혀지는 말의 발자국들은 불어오는 모랫바람에 지워져나갔다.

 

붉은 모래언덕으로 향하는 길, 그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손길은 조심스러웠고, 거리를 두려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카쉬의 거리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했다. 그들의 시선은 대부분 그녀를 향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방랑가 데인이 데리고 다니는 아가씨', '총독의 궁전에 살고 있다는 그 소녀'... 그런 수군거림들.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눈치챘다. 벨렉에서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성문을 지나자 그녀의 긴 한숨이 들렸다. 그 숨소리에는 안도감이 묻어있었다. 내가 그녀를 두고 떠났던 그 날처럼. 문득 그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그저 그녀를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를 그저 데려다주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물고 싶었다.
말발굽이 모래를 밟을 때마다 희미한 자국이 남았다가 바람에 지워졌다. 마치 내가 11년 동안 남겼던 발자취들처럼. 하지만 이제는...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저기 보이는 게 붉은 모래언덕이야. 해가 질 무렵이면 모래가 마치 루비처럼 붉게 빛나지. 사막의 보석이라고도 불러."
말의 고삐를 당기며 속도를 늦추었다. 그녀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녀는 최대한 거리를 두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조심스러움이 가슴 한켠을 아프게 했다. 내가 그녀를 두고 떠났던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그녀를 망설이게 만드는 걸까.
제피르가 우리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그의 날갯짓이 만드는 그림자가 모래 위에 드리웠다. 마치 우리를 지켜주겠다는 듯이.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그녀를 혼자 두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나 역시,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거라고.

 

아직 석양이 시작되지 않은 하늘 아래의 모래는 붉은 기운이 있을 뿐, 붉지 않았다. 언덕의 위에 도착한 나는 내 앞에 앉아있던 그가 먼저 말에서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래 위에 선 그가 내게 양 팔을 벌려보였다. 말에 타기 위해 그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 때 그랬던 것 처럼, 나는 말에서 내리기 위해 그의 품 안으로 몸을 기울여야 할 때도 망설였다. 그에게는 아마도 숱하게 있었을 일인데, 나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의 잿빛 눈동자는 여전히 무심해보여서 이토록 망설이는 나만이 한심했다.
알알히 흩어지는 모래 위로 발을 내딛었다. 모래는 부서지는 듯 하면서도 내 아래에서 버텨주었다. 그 위에서 나는 하늘과 사막의 경계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받아내기 위해 양팔을 벌렸을 때, 그녀의 망설임이 보였다. 마치 내가 그녀를 다시 버릴 것처럼, 그녀는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내 품으로 몸을 기울였고, 나는 그녀의 가벼운 몸을 받아냈다. 그 순간, 그녀의 체온이 내 가슴에 닿았다. 마치 작약 꽃잎처럼 부드럽고 연약한 온기였다. 그녀의 이름처럼.
모래 위에 그녀를 내려주었지만, 내 손은 그녀의 허리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다시 사라질까 봐 두려운 것처럼.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사막의 바람에 흩날렸다. 그 모습이 마치 모래 위에 피어난 작약 한 송이 같았다.
"리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내게 말했을지도 모르는 이름이 아닌, 내가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을. 작약이라는 뜻의 그 이름은, 어쩌면 내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것 처럼 수줍음이 아닌, 정이 깊어 떠나지 못한다는 그 꽃말처럼.
그녀는 여전히 하늘과 사막의 경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석양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나 역시, 더 이상 방랑하지 않을 거라고.
제피르가 우리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내 어깨에 앉았다. 그의 날카로운 부리가 내 귀를 살짝 쪼았다. 마치 '이제 말해'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마침내 변하기 시작했다. 하얗게 빛나던 태양이 조금씩 붉은 빛을 더해가고, 드높게 떠있던 것이 그만큼 사막과 맞닿는 곳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빛이 파르랗던 하늘 위로 번져가더니 모래 위로도 옮겨왔다. 그저 적당히, 붉은 모래언덕이라는 그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일 뿐이었던 곳이 새빨갛게 변해가며 비로소 완전해졌다. 내가 그 광경을 눈에 담는 동안, 내 옆에 서서 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보는 그가 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담겨버렸다.
이 시간이 지나면 석양은 사라지고 밤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이 모래가 지금처럼 붉게 빛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곳의 이름이 붉은 모래언덕이 아닌 것이 아니었다. 내일의 석양이 또다시 이곳을 붉게 물들일 것이고, 그 다음에도 오래도록 물들일 것이었다. 하루치의 해가 진다고 해서 그 것이 영영 끝이 아닐터였다.
두 번 구해지는 사이에 한 번 버려졌다. 한 번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구해졌고, 그 다음에는 내가 감히 바라지 못했는데 구해졌다. 두 번의 구해짐 사이의 버려짐은 그 둘을 위한 쉼표였을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 숨을 쉬어야 하는 것은, 나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방랑가였던 그에게는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오히려 지금 이렇게 내 옆에 그가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나는 이름을 얻어 그가 마련해준 자리에서 피어나는 작약이 되었다. 작약의 꽃말은 수줍음이라고 했지만, 자하라는 내게 작약에는 '정이 깊어 떠나지 못한다'는 잘 알려지지 않은 꽃말이 있다고도 알려주었다. 나는 세상에 대한 수줍음때문이 아니라, 정이 깊어서 떠나지 못한다는 작약이었다. ...그에게.
한 번 깨닫고 나니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내가 처음으로 실체화한 마력의 형태가 그의 마력 나비를 잡기 위한 꽃의 형태였는지. 왜 나는 그와 함께 하는 유일한 시간인 아침을 기다렸는지. 왜 나는 이제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보이겠다는 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몰아세우지 못했는지. 왜 나는 그가 내게 지어준 리안이란 이름을 순순히 받아들였는지. 왜 나는 한 번 홀로 남겨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조차 아닌 상품이 되었던 그 순간에 나타났던 그를 보고 안도했는지. 아니 태초에... 왜 내가, 그저 옳지 않은 일이었기에 벨렉의 화형대에서 나를 구했던 그를 무작정 따라나서서 설원을 걸었는지.
그가 나를 구했던 우연과 내가 살아야만 했던 필연 사이에는 끝내 서로를 향해 닿은 시간이 있었다.

 

석양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에 비친 석양이 마치 불꽃처럼 일렁였다. 벨렉의 화형대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도, 그녀의 눈동자는 저렇게 불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저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그녀를 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그녀의 존재가 나를 이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리안."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더 이상 방랑자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는... 떠나는 사람이었어. 정착하지 않았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았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게 편했고."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마치 작약 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나는 그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손으로 그러모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내 진심을 읽으려는 듯이.
"...그런데, 널 카쉬에 혼자 두고 간 순간에 처음으로 발걸음이 멈췄어."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내 말에 흔들렸다. 마치 사막의 모래처럼, 그녀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흔들림이 두려움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이제서야 알겠더라. 그때의 내가 널 떠난 게 아니라, 널 두고 내가 떠났다는 걸."
모래 위에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제피르는 우리 앞에 내려앉아 날개를 접었다. 이제 곧 해가 완전히 저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석양이 끝난다고 해서, 내일의 석양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치 내가 한 번 그녀를 버리고 떠났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었던 것처럼.
"마력이 공명하는 것을 알았던 때가 아니었다면, 네가 내 마력으로 만든 나비를 잡기 위해 작약을 피웠을 때라도 알았어야 했어.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어. 마치 내가 벨렉의 화형대 앞을 지나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처럼."
붉은 모래가 우리의 발끝에서 반짝였다. 마치 루비처럼, 혹은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사막의 저녁 공기처럼.
"이제는... 내가 증명해 보일게. 더 이상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리고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그녀의 손이 내 손 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마치 내 심장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가벼운 몸이 내 품 안으로 쉽게 안겨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안아본 여자들은 많았지만, 내가 먼저 끌어당긴 적은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스스로 내 품에 안겨들었고, 나는 그저 받아들였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렇게 가슴이 떨렸던 적은 없었다.
"버려서 미안해... 하지만 그랬기에 나는 돌아왔어.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녀의 몸이 내 품 안에서 떨렸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떨림이, 마치 벨렉의 화형대 위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느껴졌다. 그때도 그녀는 이렇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작약 향이었다. 마치 운명이 농담을 던지는 것처럼. 내가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처럼, 그녀는 정말로 작약이 되어 내 곁에 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향기에 취해 더 이상 떠날 수 없게 되었다.
제피르가 우리의 머리 위를 한 바퀴 돌고는 멀리 날아갔다. 아마도 샤미르에게 전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제 나는 더 이상 방랑자가 아니다. 나는 이제... 그녀의 사람이 되기로 했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서로를 향해 닿았던 시간이 운명으로 정의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랑자가 입에 담는 영원을, 다시금 내게 주어지는 곁에 있겠다는 약속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을 때에 알 수 있었다. 벨렉의 화형대에 묶여있던 나를 낚아채듯 끌어안아 구해내던 그도, 카쉬의 경매장에서 나를 구해내고 황금 궁전의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와서 내 떨림이 멎을 때 까지 안아주었던 그 동작들이 사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향했다는 것을. 망설임이 없어보였던 그 동작들 안에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을, 그만의 처음들이 있었다는 것을.
"...영원히 제 곁에 있겠다는 그 약속도, 다시 저를 떠나지 않겠다는 그 약속처럼 시간을 드리면 증명해주시겠네요."
경매장에서 구해내고는 그가 내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떠나지 않을 것이니, 증명할 시간을 달라고. 지금까지의 그는 나와 하루를 보내지는 않아도 시간을 보내며 그 말을 증명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의 그 약속과 지금의 약속은 달랐다. 떠나지 않겠다는 그 말에는 그가 아닌 내가 떠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내 곁에 있겠다는 약속에는 내가 떠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선택 없이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던 나였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 선택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니까, 기다릴게요."
내가 처음으로 그를 따라 걸었던 벨렉의 설원도, 그가 나를 두고 간 후 걷던 카쉬의 거리도, 그는 알지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를 기다리는 시간을 알게 될 것이었다. 그가 내 곁에 머물겠다는 약속을 증명하는 시간 속에서, 나 역시도 그를 믿는 법을 배워갈 것이었다. 이 사람은 떠나는 사람이었고, 나는 혼자 남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함께하는 시간이 되었다.
끌어당겨져 안겨든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숨을 내쉬었다. 그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찾기 위해 방랑했다면, 나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찾기 위해 기다려왔다. 붉게 물든 사막 위에서, 떠나는 것과 남는 것의 경계가 흐려졌다. 그리고 그 흐려진 경계 속에서, 나는 내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 영원히 있어주세요."
그가 누군가를 자신의 곁에 두는 것이 낯선 것 처럼, 나도 누군가가 내 곁에 머무는 것이 낯설었다. 그랬기에 처음으로 그를 향한 부탁을 말하는 내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떨림에 담긴 것이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그 말이 향하는 사람이 데인이라는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간절함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내 품 안에서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영원'이라는 약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11년간의 방랑 생활 동안, 나는 수많은 여인들과 하룻밤을 보냈지만 그 누구에게도 '영원'을 약속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간절함이 내 가슴을 울렸다.
"그래... 영원히 있을게. 이번엔 정말로."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녀의 체온이 내 품 안에서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마치 사막의 모래가 석양을 받아 따뜻해지듯이. 그녀가 내 품 안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샤미르의 말이 떠올랐다. '넌 그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래, 어쩌면 그가 맞았을지도 모른다. 11년간의 방랑은 그저... 그녀를 만나기 위한 준비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방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곁에, 영원히 머물 것이다.
석양이 완전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내일의 석양도, 모레의 석양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닌, 서로의 곁에서.

 

'Chat log'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애쉬 #1  (2) 2025.03.16
휴고 듈리스 #1-1  (5) 2025.03.05
레이븐 #2  (1) 2025.03.02
데인 #2  (2) 2025.03.02
온디로스 #1  (0) 2025.02.23